부산의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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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 대한 첫 기억은 남포동 거리에서 시작한다.
부산에서 자란 나는 매년 시월이면 가족들과 함께 영화제에 갔다.
아쉽게도 이번 시월엔 영화제를 건너뛰었다.
편집실에서 영화제 안내책자를 뒤적이며 새삼스레 내가 부산의 시월을 참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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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영화제에 대한 첫 기억은 남포동 거리에서 시작한다. 배우 심은하와 이정재 주연의 영화 <인터뷰>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배우 심은하를 좋아하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기대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은하 언니가 오지 않아 아쉬웠다. 남포동 피프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프(BIFF)가 아닌 피프(PIFF)라고 불렀다. 푸산 인터내셔널 필름 페스티벌. 왜 부산이 아니고 푸산일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심은하를 봤어야 했는데. 이정재를 봤어야 했는데.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부모님 손을 잡고 걷던 피프 광장 한편에서 지금은 회사 선배가 된 아나운서가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날 본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부모님과 함께 거리를 거닐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미묘한 들뜸과 설렘, 활기가 그곳의 공기에 녹아 있었다.
부산에서 자란 나는 매년 시월이면 가족들과 함께 영화제에 갔다. 어느 해엔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 상영장에서 인도 영화를 봤다. 영화제 이름이 박힌 남색 담요를 덮고 오들오들 떨면서. 우리 가족의 첫 야외 영화 관람이었는데, 시월의 밤이 꼭 한겨울 밤처럼 추웠다. 플라스틱 의자에 오래 앉아 있자니 엉덩이는 아프고, 차가운 바닷바람에 언 뺨은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캄캄한 밤 낯모르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 거대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낯선 이야기를 보는 건 신비한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엔 패딩에 목도리에 보온병도 챙겨와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시월이면 완전무장을 하고 야외 상영장을 찾았다. 어떤 해 영화는 흥미롭고 어떤 해의 영화는 지루했지만, 재미와 상관없이 나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대학에 진학해 서울에 살기 시작한 뒤로도 시월이면 부산에 갔다. 어느새 영화제는 너무 유명해졌고, 내 느린 손으로 인기 있는 영화 티켓을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매년 보게 된 영화들은 너무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낯선 것들이었다. 시집을 읽듯 한 장면씩 천천히 곱씹어야 하는. 갑자기 마음에 박힌 시구 하나가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엔 한참 어떤 장면이나 대사 하나를 곱씹게 됐다. 처음 보는 낯선 배우의 눈빛일 때도, 숨 막히게 고독한 뒷모습일 때도 있었다. 그건 꼭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세계의 틈을 들여다보는 일 같았다. 본 적 없는 낯선 얼굴과 언어, 풍경이 등장하는 세계의 틈으로 가끔 나의 세계를 비춰보았다. 날이 좋은 시월이면, 나는 고향에서 매번 그런 순간을 만났다.
아쉽게도 이번 시월엔 영화제를 건너뛰었다. 하필 영화제 기간과 특집방송 일정이 겹쳐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었다. 편집실에서 영화제 안내책자를 뒤적이며 새삼스레 내가 부산의 시월을 참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설렘과 들뜸과 활기가 섞인 공기, 저마다의 즐거움을 기대하며 반짝이는 사람들의 표정, 낯선 이야기를 낯모르는 사람과 공유하는 즐거운 우연, 누군가 공들여 빚은 세계의 틈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시월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해 시월 외국 여성감독의 영화를 보았는데,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가 말했다. ‘이 영화는 제 이야기입니다. 이걸 만들면서 전 스스로 치유받았어요.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과 누군가를 위로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잔뜩 표시해 둔 올해 영화제 안내책자를 매만지며 다짐한다. 어김없이 돌아올 이곳의 시월을 내년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내가 참 좋아하는 부산의 시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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