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라투르와 새로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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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최원형 | 책지성팀장
이달 세상을 떠난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인류학’으로 출발해 서구 근대성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근대성의 철학’, 인간이 비인간 행위자들과 이루는 공동체를 구상하는 ‘정치생태학’과 ‘결합의 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사유를 심화시켰던 사상가다. 라투르 연구자들이 쓴 책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사월의책)에서 잘 정리해 제시한 바 있는 라투르의 이 ‘네가지 얼굴’은 거칠게 아우르면 결국 한가지 핵심 인식, 곧 비인간은 인간과 다름없는 ‘행위자’이며 모든 사물은 동등하다는 존재론으로 수렴된다. 예컨대 과속방지턱은 인간이 기술로 만든 인공물이지만, 운전자의 행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다. 이렇듯 ‘평평한’ 라투르의 존재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고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해온, 마치 중력처럼 완고한 이분법적인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다양한 갈래의 사유들에 큰 영향을 줬다.
라투르를 깊이 연구해온 그레이엄 하먼은 “라투르의 경력에서 가장 큰 역설은 그가 사회과학 영역에서 상징적인 지위를 얻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이 영향력을 미치고자 바랐던 철학 영역에서는 미미한 임팩트를 누리는 데 그쳤다는 것”이라고 썼다. 하먼은 자신의 저작 <네트워크의 군주>(갈무리)를 통해 철학자로서 라투르의 면모를,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갈무리)를 통해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톺아본 바 있다. 라투르가 끊임없이 ‘정치’를 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에서 그의 존재감은 어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감이 있다. 심지어 라투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저작은 <녹색(생태) 계급의 출현>(이음)이다!
‘물정치’(사물정치·Dingpolitik)는 라투르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말이다. 라투르는 인간만이 점유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에 사물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 코로나바이러스, 과속방지턱, 유전자변형 식품, 히잡 착용, 빙하 붕괴 등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과 비인간의 하이브리드적 결합은 오늘날 그 어떤 것보다도 정치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데, 인간만이 중심이 된 기존 정치에서는 이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코스모스)를 ‘정치적인 것’의 핵심 대상으로 삼아야(코스모폴리틱스) 한다고 주장했다.
라투르의 정치철학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 두가지를 새롭게 문제화했다는 사실이다. 흔히 정치는 어떤 공동세계 속 구성원들을 드러내고(re-present), 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들을 정당하게 대표(represent)하는 문제로 여겨진다. 라투르는 “공화국(res public)은 그다지 많은 사물(res)을 포함하지 않는다”며, 서구 유럽의 언어적 전통에서 ding(thing) 등은 “정치적 공간 바깥으로 던져진 채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를 의미하는 한편 사람들의 의견을 분열시키고 바로 그 이유에서 사람들을 한자리로 모으는 쟁점을 의미”했다고 새겼다.
그러니까 쟁점을 형성하는 일과 그것을 통해 대중을 불러 모으는 일은 사실 서로 같은 것이며, 그것은 ‘사실’(matter of fact)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matter of concern)을 갖고 온갖 불확실성을 헤치며 발견하고 건져 올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실제적으로 항상 혼재돼 있음에도 이론적으로는 분리된 ‘재현’(represent)이란 말의 두가지 의미를 통합”함으로써, 라투르는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계승’된 유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낡은 정치를 깨뜨릴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인간의 의회’ 지붕 아래에서가 아니라, 쟁점에 따라 자리를 바꿀 온갖 사물들을 감싸는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지붕 아래에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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