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개인 권리 보호” “바이든, 뭘 했나” 미 중간선거 최대 격전지 필라델피아를 가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 1차전 당일인 지난 28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최대 도시 필라델피아의 시선은 겉보기엔 온통 야구에 쏠린 듯했다. 2008년 이후 14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놓고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겨루는 날이었다. 거리마다 필리스를 응원하는 ‘붉은 10월’ 깃발이 나부꼈고, 팀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후드티 차림의 행인들이 눈에 띄었다.
야구 열기 속에 중간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뒷전으로 밀려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날 필라델피아 곳곳에서 12시간 동안 머물며 만난 시민 40여명은 외국 기자에게도 선거와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필라델피아 도시와 교외에 사는 이들은 세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무당파, 경제, 선택. 뚜렷한 정당 지지 성향이 없는 ‘스윙보터’들이, 인플레이션 등 ‘경제’ 이슈와 임신중단권 등 개인의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에 선거 결과가 달려있다는 암시처럼 들렸다.
펜실베이니아주는 다음달 8일 있을 중간선거에서 대표적 경합주다. 2016년에는 접전 끝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했고,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를 가져왔다. 민주당은 펜실베이니아를 이번 상원선거에서 공화당 의석을 가져올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역구로 보고 있다.
■“청년층 투표해야” 대학가 분주
워싱턴에서 기차로 두 시간 만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자마자 유니버시티 시티로 향했다.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 모두와 인연이 깊은 명문 펜실베이니아대가 있는 대학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모교(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이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2013년 명예박사학위를 주고 2017년 부통령에서 물러난 그를 교수로 초빙한 곳이다.
대학 부설 연구소가 자리한 작은 건물에선 청년층 투표 장려 운동을 하는 학생단체 펜 보트(Penn Vote)의 대책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초당파 조직인 이 단체는 학생들의 유권자 등록,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청년 유권자는 2018년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견인했다.
대학원생 활동가 헤일리는 “예년보다 확실히 청년들의 관심이 높다”고 전했다. 이유를 묻자 “(지난해 1월 의사당) 폭동, (지난 6월 임신중단권을 폐기한 연방대법원 판결) 돕스”를 들었다. 펜실베이니아, 네바다, 조지아 등과 더불어 격전지로 꼽히는 아리조나주에서 온 여학생 스칼라도 “재생산권을 보장할 후보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캠퍼스 내에서 접한 여론은 주로 ‘민주당 선호’에 가까웠다. 대학 졸업 등 고등교육 여부가 정당 지지를 결정하는 확고한 요인으로 자리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이번엔 개인의 권리 보호가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한다”며 “질서있는 정부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도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정당 후보를 뽑을 순 없다”고 했다.
■사전투표 열기, “여성들 관심 높아”
펜실베이니아는 사전 우편투표 제도를 도입하면서, 투표용지 수거함도 여러 곳에 설치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트럼프 전 대통령과 ‘친트럼프’ 공화당원들을 맹비난하는 연설을 한 장소인 독립기념관 근처의 공립도서관 앞에도 이런 수거함이 있었다.
주 정부는 사전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면’ 우표투표소도 함께 도입했다. 빅토리아 양식의 유서 깊은 건물인 필라델피아 시청 1층에도 시민들이 투표용지를 직접 수령해 기표할 수 있는 투표소가 마련됐다. 피부색과 나이, 성별이 각기 다른 유권자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20대 여성 켈시는 “시민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시청 앞에선 ‘전국 조기 투표의 날’을 맞아 투표 독려 캠페인이 진행됐다. 초당파 지역 시민단체가 주최한 행사에는 최대 500명이 운집했는데, 특히 여성들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미국여성유권자연맹 필라델피아지부의 로렌 크리스텔 대표도 “선택의 문제가 걸린 선거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여성, 그중에서도 교외 거주 여성들은 펜실베이니아 등 경합지역 승패를 좌우할 변수로 거론된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민주당 후보 선거자금 모금을 위한 만찬 행사 참석차 나란히 필라델피아를 찾았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동반 유세는 드문 일이다. 그만큼 민주당이 펜실베이니아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행사 장소인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에서 만난 펜실베이니아주 민주당 관계자는 들뜬 목소리로 “티켓 2000장이 모두 동이 났다. 처음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선거까지) 남은 11일 동안 펜실베이니아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 민주당원, 주류 공화당원 그리고 무당파까지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에 투표하겠다는 시민들조차 바이든 대통령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50대 흑인 여성 로잘린은 “평생 민주당 후보를 뽑았고, 트럼프는 도둑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솔직히 바이든이 지난 2년간 뭘 했는지 모르겠다. 미국인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30대 대학 교직원 제이비어는 “학자금 대출 탕감 때문에 민주당에 표를 줄 것이지만, 바이든은 지지하지 않는다. 경제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낮에는 응급구조사, 밤에는 우버 기사로 ‘투잡’을 뛰는 케이멀은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뽑았지만 이번에는 공화당 후보를 뽑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은 안전 문제를 너무 경시했다. 낙태, 성소수자 권리 다 좋은 말이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지지” 거침없이 밝힌 시민들
해 질 녘이 되자 필라델피아를 연고로 하는 야구·미식축구·하키·농구팀의 주 경기장이 모여있는 ‘사우스 필리’ 구역의 술집마다 응원 인파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필리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의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필라델피아시 선거구는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2020년 대선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에 80% 이상의 몰표를 보냈다. 하지만 이 날은 교외 거주자들이 월드시리즈 응원차 대거 시내로 나왔기에 도심에서도 쉽게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명 스포츠바 앞의 상점에서 복권을 구입하는 60대 부부 로버트와 리사에게 다가가 ‘선거 취재를 위해 워싱턴에서 온 한국 특파원’이라고 말을 건넸다. 이들은 곧바로 “트럼프가 돌아와야 한다”며 “사실 트럼프가 이겼는데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고 말했다. 30대 백인 남성 닉은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잘 했고, 저항이 없었다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0대 남성 존은 “지난번에는 트럼프를 뽑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뽑을 거다. 트럼프는 미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때 ‘샤이 트럼프’ 세력을 간과한 것이 2016년 대선 결과 예측에 실패한 원인이라는 식의 분석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적어도 필라델피아에서만큼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숨지 않았다. 처음에 무당파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어느 펜실베이니아대 경비 직원은 “내가 바로 ‘트럼프 가이’다. 트럼프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휘발유 가격이 올라서 평소보다 한 달에 100달러 이상 더 내고 있다. 트럼프 때는 경제가 훨씬 좋았는데, 지금은 (금융위기 때인) 버락 오바마 집권기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경합주 펜실베이니아의 표심은 다음 달 8일 중간선거는 물론 2024년 대선 판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미국인들도 그들의 표가 지닌 무게를 자각하고 있었다. 건설 노동자 조는 ‘당신의 표가 2년 뒤 대선을 결정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직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라델피아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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