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상황, 비의도적 물리현상 '군중난류'와 유사

박정연 기자 2022. 10. 3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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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 "의도적인 밀침과는 구분되는 물리적 현상"
30일 오전 소방 관계자들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인명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에서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 상황은 좁은 공간에 갑작스럽게 수많은 인파가 몰리며 일어나는 물리현상인 '군중난류'와 유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달 초 인도네시아에서 프로축구 경기를 보던 관중들이 난동을 부리던 중 경찰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10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에 이어 한국에서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며 사고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도 관심이 모인다. 

과학적 원인으로는 지난 2010년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세계 최대 테크노 댄스축제 '러브 퍼레이드'에서 최소 19명이 사망하고 340여명이 다치는 대형 압사사고 이후 독일과 프랑스 과학자들이 제시한 '군중난류(crowd turbulence)' 현상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과학자들은 군중난류로 발생한 사고의 경우 의도적인 밀침이나 짓밟기와는 구별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독일, 스위스 과학자들 압사사고 원인으로 '군중난류' 지목

메흐디 무사이드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연구원팀은 압사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2011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통상 사람들은 이동할 때 보행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시야를 확인한 뒤 움직인다. 인파가 밀집된 지역에선 이 같은 인지활동이 불가능하게 되는데 이때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밀집된 지역에서 사람들이 원활하게 이동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적인 규정으로는 '좌(우)측보행'이 있다.

하지만 방향에 대한 안내가 없고 인파가 극도로 몰리면 보행의 흐름이 무너지게 된다. 연구팀은 사람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혼란스러운 집단적 운동패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군중난류'라고 부르고 압사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제시했다.  

군중난류는 ‘대기열 현상’에 의해 촉발된다는 연구도 있다. 더크 헬빙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교수 연구팀이 2012년 국제학술지 ‘EPJ 데이터과학’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기열이 길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때 사람들 간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부주의한 신체접촉이 발생하고 의도치 않은 ‘밀침’이 발생할 수 있다.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밀침이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하고 스트레스와 공격성이 유발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한정된 시야로 확인된 정보를 통해 합리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려 하거나 혹은 계단과 같은 높은 지대로 이동하려는 움직임 등이다. 사람들이 다른 판단에 따라 움직이면서 보행의 흐름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연쇄적인 사람들 간의 충돌이 이어지게 된다. 사방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에 휩쓸린 사람들은 결국 '군중난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다. 

군중난류는 넓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밀집되는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지점과 경사로에서 발생하기 쉽다. 군중안전 전문가인 키이스 스틸 영국 서퍽대 방문교수는 2012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군중 밀도가 1제곱미터(m2)당 4~5명을 초과하면 혼란상태가 빠르게 축적될 수 있으며 특히 지면이 평평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 발생할 위험이 높다”고 설명했다. 경사로에서 넘어진 사람 때문에 발걸음을 제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비틀거리면서 혼란스런 움직임의 ‘도미노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헬빙 교수팀이 2010년 독일 뒤스부르크 ‘러브퍼레이드 압사사고’ 영상을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분석한 결과에서도 사고지점은 병목현상지와 경사로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장소도 독일과 프랑스 과학자들이 제시한 군중난류가 발생하기 쉬운 장소의 조건과 일치한다. 이번 사고는 이태원역 1번 출구로 이어지는 폭 4m 가량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에서 발생했다. 

●“군중난류는 의도적인 밀침, 짓밟기와 구별되는 물리적 현상”

과학자들은 군중난류가 흔히 압사사고의 원인으로 꼽히는 ‘의도적인 밀침’이나 ‘의도적인 짓밟기’와는 구별되는 물리적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헬빙 교수 연구팀은 2012년 해당 논문을 통해 “군중난류는 사람들 간의 밀도가 너무 높아졌을 때 발생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으로,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군중의 힘이 갑작스럽게 합산돼 전달되는 특정한 종류의 역학”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주된 요인은 심리학적 요인이 아닌 물리 법칙으로 누군가의 나쁜 의도가 없어도 잘못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며 “압사사고의 원인으로 의도적인 밀침이나 짓밟기를 지목하는 것은 군중을 비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틸 교수 또한 2012년 보고서에서 “군중난류는 한 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고 여러 가지 실수와 오판, 불운의 치명적인 조합으로 발생한다”며 “한 명의 원인 제공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군중난류에 처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무사이드 연구원은 2019년 호주의 연구논문 분석매체인 ‘더컨버세이션’에 “똑바로 서도록 노력하고, 흉곽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가슴 높이로 유지해야 하며 질식 위험을 낮추기 위해 비명을 지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군중이 과도하게 밀집된 환경 자체를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석재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홍보이사는 “실제 인파가 밀집된 장소에선 안전을 위해 팔을 뻗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 홍보이사에 따르면 이번 사고의 사상자 대부분은 흉부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발생한 호흡부전에 의해 뇌에 혈류가 전달되지 않는 외상성 질식을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뇌에 혈류가 전달되지 않은 채 1~3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발생하며 10분 정도가 지나면 심폐소생술조차 소용이 없다”며 “하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적기에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긴 어렵다”고 말했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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