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의장 남편 자택서 피습…“미국 민주주의 위기 징표”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이 살해되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전화 폭언에서 시작된 것이 이제 실제 위협과 폭력으로 옮아가고 있다.”
미국 공화당의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은 이달 초 언론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1997년부터 26년째 메인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재직 중인 그의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는 일이 벌어졌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82)의 남편 폴 펠로시(82)가 지난 28일(현지시간) 펠로시 의장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한 것으로 보이는 남성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두개골 골절 등의 부상을 당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 당국 발표에 따르면 데이비드 드파페(42)라는 남성이 펠로시 하원의장 자택에 침입한 것은 28일 새벽이었다. 괴한이 뒷문으로 침입한 것을 인지한 폴이 몰래 911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고 새벽 2시30분쯤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을 당시 두 사람은 망치를 뺏으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드파페는 폴에게서 뺏은 망치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고, 이후 경찰에 제압돼 체포됐다. 경찰은 드파페를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다. 사건 발생 당시 펠로시 의장은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다.
드파페가 펠로시 의장 집에 침입한 정확한 동기는 조사 중이지만 펠로시 의장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침입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는 여러 차례 “낸시는 어디 있느냐?”면서 펠로시 의장을 찾았고, 그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 그가 귀가할 때까지 폴을 묶어 두려고 했던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윌리엄 스콧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이 건은 임의로 벌어진 행위가 아니다. 의도적인 범행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들은 펠로시 의장 자택을 침입한 인물과 동일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데이비드 드파페라는 이름의 네티즌이 인터넷에 개설한 블로그에 유대인 혐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2020년 미국 대선 사기 주장을 비롯해 극우 음모론을 지지하고 폭력을 조장하는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월4일 이후 공화당 후보와 관련 단체가 펠로시 의장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된 정치 광고를 3690만달러(약 526억원)어치 집행했다면서 펠로시 의장은 10년 이상 공화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정치인에 대한 위협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위협의 폭과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위협과 폭력을 비판하기는커녕 스스로 정치적 반대파를 향해 독설과 위협적인 언사를 수시로 날리면서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미 의회 경찰 자료를 보면 상·하원 의원과 가족이 위협받았다고 신고된 건수가 지난해에만 9625건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16년 이후 10배 이상 늘었다.
미국에서 최근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정치 폭력 사례는 지난해 1월6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 수천명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한 대선 결과를 뒤집겠다면서 연방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일 것이다. 2020년 10월에는 민주당 소속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 납치를 모의한 무장단체가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되기도 했다.
정치 테러의 상당수가 공화당 지지자 또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에 의해 자행됐지만 민주당 지지자가 벌인 사건도 적지 않다. 스티브 스캘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가 2017년 공화당에 불만을 품은 남성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지난 6월에는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 폐기 판결에 불만을 품은 남성이 보수 성향의 브렛 케버노 연방대법관을 살해할 목적으로 그의 자택 주변을 배회하다 체포된 사례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2016년 이후 정치인을 위협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 75건을 분석한 결과 3분의 1 이상이 공화당 지지자 또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가 민주당 또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충성하지 않는 공화당 의원을 위협한 사건이었다고 전했다. 민주당 지지자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 그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공화당 정치인을 위협한 사건은 4분의 1을 차지했다.
정치인에 대한 위협과 공격 증가는 그것 자체로 민주주의 위기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정치적 이견과 갈등이 토론과 논쟁, 선거를 통해 조정되고 해소되는 게 아니라 물리적 위협과 폭력이라는 ‘비정치적 수단’으로 번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미국 중간선거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직도 패배를 승복하지 않고 있는 2020년 11월 대선 이후 치러지는 첫 전국단위 선거이다. 각 주 선거 당국은 선거 관리 공무원과 투·개표 자원봉사자 및 가족에 대한 위협 가능성에 대비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공화당 일부 후보들은 벌써 부정 선거 가능성을 제기하며 패배하더라도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선거 관리 공무원과 자원봉사자에 대한 위협과 테러, 선거 결과를 둘러싼 법적 분쟁과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다.
메릴랜드대 부설 테러리즘 연구소(START)의 마이클 젠슨 박사는 워싱턴포스트에 “대통령이나 상원의원, 주지사에 대한 위협은 항상 있었지만 이제는 선거 자원봉사자, 학교운영위원회 위원, 보건위원회 위원 등 지역 단위까지 위협이 확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젠슨 박사는 지난해 1월6일 의사당 습격 사건으로 심각한 경보가 울렸지만 미국 사회는 폭력을 조장하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결별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김재중 기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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