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정율성로’에는 왜 정율성이 지은 ‘북한 군가’가 없는가[박종인의 징비]

박종인 선임기자 2022. 10. 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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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과 모두 있어야 하는 역사의 평가
광주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거리전시관'.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가 된 '팔로군행진곡'과 북한 인민군 군가로 쓰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한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gp0Cujk4qwk에서 북한 군가와 중국 군가를 포함해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주 양림동에는 ‘정율성로’라는 거리가 있다. 양림역사지구 휴먼시아 아파트단지에서 이 정율성이라는 인물 생가까지 짧지 않은 구간이 정율성로다. 1914년 이곳에서 태어난 음악가 정율성을 기리는 도로다.

2004년 6월 정율성 생가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2008년 4월 정율성 아내 정설송이 기증한 각종 유품과 음원 자료로 정율성거리전시관을 설치했다. 5월 거리전시관을 개관하고 중국 운남성 기예단과 귀주성 전통무용단 초청 공연이 열렸다. 2009년 1월 29일 양림동 휴먼시아 아파트와 정율성 생가 구간 거리를 ‘정율성로’로 도로명을 부여하고 개통식을 거행했다. 2010년 중국 광저우시 해주구 청년연합회에서 흉상을 설치했다. 그 동안 정율성동요제,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 같은 행사가 열렸다. 정율성거리전시관에는 정율성 행적과 연보가 전시돼 있다. 모든 설명은 한글과 중국 간체로 적혀 있다.

누구인가, 정율성은. 정율성은 식민시대에 광주에서 태어난 조선인이다. 그리고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음악가다. 그리고 북한 인민군의 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한 사람이다.

망명과 항일투쟁

정율성은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생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본명은 정부은이다. 원체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설립한 남경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했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셋째 형인 정의은이 입국해 동생을 데려갔다.(김주용, ‘정율성의 생애와 항일민족운동’, 동국사학 51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1)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 정율성은 군사, 전술, 공작, 역사를 배웠다.

1936년 상해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 뒤 정율성은 이듬해 연안으로 가서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8년 연안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중국 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송가’ ‘연안송’을 작곡했다.(안천, ‘붉은혁명 작곡가 정률성 연구(2)’, 음악교육 2호, 한국유초등음악교육학회, 2002)

<중국 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송가>라는 표현은 위 논문에서 인용한 표현이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 한계가 적지 않다’고 서론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 논문이 가지고 있는 시각은 철저한 중국측 시각이다. 그런데 정율성 행적이 가장 자세하게 인용돼 있어 이 논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인용한다.

팔로군진행곡과 문화혁명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정율성은 ‘팔로군진행곡(행진곡)’을 작곡했다. 작사는 공목이라는 시인이 맡았다. 중국공산당 휘하 부대인 팔로군은 이 행진곡을 군가로 채택하고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1949년 10월 1일 국민당 정부를 축출하고 대륙을 차지한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식을 북경에서 열고 정율성의 ‘팔로군진행곡’을 연주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인 ‘인민해방군 군가’가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진행곡’이다.

잠시 북한에 귀국했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정율성은 이후 300여 곡을 작곡하고 유럽 순회공연을 펼쳤다. 혁명가도 많았지만 서정적인 곡들도 많았다. 그러다 정율성은 문화혁명 와중에 간첩으로 몰려 박해를 받다가 1976년 복권된 뒤 그해 12월 7일 죽었다.

광주 정율성거리 전시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정율성이라는 음악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향 광주에서는 정율성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그 결실이 2004년 정율성 생가 표지석 설치 및 이후 정율성로 조성 사업이었다. 특히 생가에 대해서는 광주시내 타 지역과 화순에서 생가 논란이 벌어질 정도로 정율성에 대한 관심은 열광적이었다.

그래서 현재 설치된 거리 전시관을 보면 ‘조선사람 정율성’이 중국에서 벌인 업적들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연안송’이라는 서정적인 중국 국민 애창곡을 짓고, 항일 투쟁을 하고, 항일 군가를 작곡하고 그 군가가 지금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사용되고 있다 등등.

거리 입구 소공원에 설치된 정율성상 기단의 ‘주요약력’을 본다. <’숭일소학교(양림동 소재) 졸업(1927), 신흥중학교(전주) 입학(1929), 중국 남경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학(1933), 노신예술학교(연안 소재) 음악학부 입학(1938), ‘연안송’ 작곡(1938), ‘팔로군행진국(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1939), 팔로군에서 항일투쟁(1942), 문화혁명으로 인해 특무(간첩)라는 죄명으로 감금 및 자격 박탈(1966), 문화혁명의 종결로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고혈압으로 사망(1976)> 거리전시관에 있는 약력과 연보도 동일하다. 주요작품은 ‘연안송’, ‘팔로군행진곡’, ‘흥안령에 눈이 내리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요’ 등이 있고 기타 46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전시관에는 ‘동아시아의 항일운동 역사를 찬란히 빛내고 세계의 평화를 진정으로 노래한 예술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이력이 눈에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동아시아의 해방이 찾아오자 한동안 북한에서 거주하며 음악활동을 하였고, 한국전쟁 기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하략)’.

그 ‘북한에서의 음악활동’이 무엇이었을까. 이상하게도 거리전시관 휴먼시아 아파트 담벼락을 가득 메운 정율성 연보에는 ‘1950년대 북한 활동’이 빠져 있다. 흉상 아래 붙어 있는 동판에도 그 북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1945년 해방 직후 평양으로 귀국해서 6·25전쟁 전후 기간 ‘조선인 정율성’이 ‘조선으로 귀국해서’ 벌인 활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

6.25전쟁 당시 정율성.

‘팔로군진행곡’의 실체

정율성이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창작활동이 바로 ‘팔로군진행곡’ 작곡이다. 그런데 항일투쟁기에 창작한 이 노래는 이후 1951년 2월 중앙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부는 팔로군진행곡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결정했고 2년 뒤 인민혁명군사위원회는 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각종 경축대회, 의식, 열병 공식곡으로 지정했다.(중국 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 류연산, ‘중국, 북한 군가 작곡한 위대한 음악가 정률성’, 월간말, 2006년 3월호) 1988년 7월 25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소평은 이를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로 선언했다. 이 곡은 ‘항일전쟁(대일 항전)과 해방전쟁(국공전쟁), 그리고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을 거쳐 1965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제목을 바꿨다.(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 공식홈페이지(www.gov.cn) 2019년 8월 1일, ‘80년 울려 퍼진 군가[’軍歌嘹亮八十年'])

그러니까 10년 동안 항일투쟁가, 4년 동안 대국민당 투쟁가는 물론 6·25 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에 맞선 중국 인민해방군이 불렀던 노래라는 뜻이다.

6·25전쟁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그렇다면 그 6·25전쟁을 전후해 정율성이 북한에서 한 일은 무엇이었나.

1946년 1월 황해도 해주 노동당선전부장에 임명된 정율성은 해주음악전문학교를 맡았다. 1947년 3월에는 훗날 조선인민군 협주단이 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협주단 단장이 됐다.

정확한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6·25전쟁 전 협주단장 시기에 작곡한 음악이 ‘조선인민군행진곡’이다. 정율성이 만든 곡에 시인 박세영이 가사를 붙였다. 가사는 이러했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의 인민군

정의와 평화 위해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바로 이 ‘조선인민군행진곡’이 1968년까지 북한 인민군이 사용했던 북한 군가다. 그리고 ‘조선해방행진곡’, ‘조국의 아들’, ‘인민공화국의 가치’, ‘공군의 노래’, ‘우리는 땅크 부대’ 같은 군가를 다수 작곡해 보급했다. 안천이 쓴 앞 논문에 따르면 이들 곡은 ‘대부분 방공호나 눈보라치는 길가에서 입김으로 만년필을 녹여가며 쓴’ 것이다.

광주 정율성로 입구 소공원에 설치된 정율성 흉상. /박종인 기자

‘정율성로’ 어디에도 없는 북한 내 행적

정율성로 거리전시관 어디에서도 ‘팔로군진행곡’이 6·25 전쟁 때 중국군이 부르며 행군했던 군가라는 설명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다. 그리고 정율성이 해방 때부터 6·25 전쟁까지 북한에서 한 행적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만든 노래가 남침한 인민군 군가였고 그가 다른 군가들을 작곡해 인민군 부대에 보급했다는 사실도 찾아볼 수가 없다.

1951년 잠시 중국으로 돌아갔던 정율성이 다시 전쟁터로 돌아와 백운산 전투에 투입된 중국 인민해방군을 위해 ‘백운산을 노래하자’,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영예로운 지원군’ 같은 군가를 창작했다는 사실도(안천, 앞 논문) 정율성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흉상이 있는 소공원에서부터 정율성로 끝 골목에 있는 생가 표지석까지, 해방 후 6·25전쟁 때까지 정율성이 한 행적은 철저하게 공백으로 가려져 있다.

광주 정율성로에 전시돼 있는 정율성 연보. 1950년대 부분에 '해방~6.25 전쟁' 기간 북한 체류 시 한 행적은 생략돼 있다. 정율성은 이 시기에 북한 군가를 짓고 전쟁에 참여했다. /박종인 기자

정율성의 존재를 처음 발굴한 사학자 이이화(1937~2020) 또한 ‘해방 후 해주와 평양으로 가서 음악활동을 벌이다 중국으로 돌아간 뒤 1950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조국땅을 밟았다. 하지만 끝내 고향땅 광주를 밟지 못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했을 뿐이다.(이이화, ‘천재음악가 정율성’,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92권 3호, 사회평론, 1992)

1991년 평양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가 제작한 '음악가 정률성'. 인트로부분에 '팔로군행진곡', 결말 부분에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 과정이 묘사돼 있다. /유튜브

왜 안 밝히는가

이글은 정율성의 음악성을 폄훼하거나 그의 중국 내 항일투쟁을 부정하려는 글이 아니다. 문제는 ‘왜곡(歪曲)’이다. 진실을 조작하는 행위를 왜곡이라고 한다면 사실을 숨겨서 입체적 파악을 방해하는 행위도 왜곡이다. 오히려 더 큰 왜곡이다. 공적과 흠결을 그대로 밝히는 게 제대로 된 선양작업이고 제대로 된 평가다.

대한민국 정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는 1991년 평양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가 제작한 예술영화가 소장돼 있다. 제목은 ‘음악가 정율성’이다. 상하 두 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팔로군진행곡’의 창작과정이 초반에, ‘조선인민군행진곡’ 창작과정이 결말에 나온다. 유튜브에도 상하 전편이 올라와 있다. 이 글에 붙어 있는 영상에도 해당 부분이 첨부돼 있다. 독자들, 특히 정율성로를 조성한 분들은 꼭 보시기 바란다. 강조하건대, 정율성로를 없애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은폐하지 않고, 전부를 공개하라는 말이다. 정율성로가 조성된 직후 조선족 자치구 상무위원 류연산은 ‘조선인민군행진곡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불의의 적에 맞서 싸워 이기자는 민주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노래’라며 ‘조선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유명해진 역사의 아이러니를 작가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없다’고 했다.(류연산, 앞 논문)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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