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흑해함대 공격” 주장…흑해상 곡물 운송협정 파기 예고
러시아가 흑해함대와 자국민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드론 공격을 받았다며 흑해 항구를 통한 곡물운송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예고했다. 러시아는 이번 공격에 서방 국가가 개입했고, 이로 인해 선박의 안전한 항행이 어려워졌다며 협정 파기의 책임을 떠넘겼다. 안정세로 접어들었던 곡물가격이 또 한번 요동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러시아 국방부는 2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항구에서 농산물 수출에 관한 협정 이행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협정 이행 중단 관련해 이날 크름반도(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 있는 흑해함대와 민간 선박이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테러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임명한 미하일 라즈보자예프 세바스토폴 시장은 텔레그램을 통해 이날 오전 4시20분쯤 테러 공격이 이뤄졌다면서 “이번 공격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드론 공격이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군은 이번 공격에 총 16대의 드론이 동원됐다면서 드론을 대부분 격추했지만 흑해함대 소속 기뢰제거함(소해함)과 군차량 일부는 파손됐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의 주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받은 소해함은 흑해를 통한 곡물수출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뢰제거 임무를 수행하던 선박이다.
안톤 게라셴코 우크라이나 내무장관 보좌관은 일부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군의 소해함은 물론 호위함과 상륙함 등 군함 여러 척이 파괴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공격을 감행했는지 여부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서, 러시아군의 대공미사일 S-300의 발사 실패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러시아는 이번 드론 공격 배후에 영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공식 성명을 내고 “영국 군사전문가들이 이끈 우크라이나군의 행동으로 인해 민간 수출 선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며 “세바스토폴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30일부터 흑해 곡물수출 협상 참여를 무기한 중단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도 “우크라이나의 곡물수출선을 통제하는 이스탄불 합동조정센터(JCC) 내 러시아 대표단에게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영국 국방부는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불법침략의 처참한 결과를 외부 탓으로 돌리기 위해 거짓 주장을 퍼뜨리는 데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산 곡물운송 협정은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지난 7월22일 체결됐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현재까지 900만t 이상의 곡물을 수출했다. 120일 동안 한시 적용 방침에 따라 이해 당사국 간에 합의가 없으면 다음달 22일 만료된다.
러시아는 지난달부터 서방이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며 협정 파기 가능성을 내비쳤다. 협정 체결 당시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곡물·비료 거래와 관련된 기업과 은행들을 대러시아 제재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해당 품목 시장을 개방하기로 약속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지난달 초 서방 정부가 러시아에 곡물·비료 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물류 제재를 중단하지 않아 러시아의 수출량이 약속만큼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겐나디 가틸로프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이달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크름대교 폭발 등 우크라이나의 테러공격이 계속된다면 러시아는 언제든 협정에서 탈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흑해상 곡물운송 협정에 따라 국제 곡물가격은 안정세를 되찾았다. 밀 선물 가격은 5월 고점 대비 30% 이상 하락하고, 옥수수 선물 가격도 동기 대비 11% 내렸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집계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도 지난달 136.3으로 6개월 연속 하락했다. 하지만 여전히 밀과 옥수수 가격은 작년 말 대비 각각 18%, 24% 높은 수준이다. 러시아가 이날 곡물운송 협정 참여 중단을 선언하면서 세계 곡물 가격이 다시 요동칠 수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곡물운송 협정을 방해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는 전 세계인과 가정에 더 많은 돈을 내거나 굶으라고 선언하는 것”이라면서 “협정 이행을 중단함으로써 러시아는 또 다시 식량을 무기화해 소득 수준이 중간 이하인 국가들과 세계 곡물 가격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인도적 위기와 식량 불안정성을 더욱 악화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러시아가 식량위기를 고조시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는 곡물수출 협상을 파기 위해 거짓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대변인은 “협정의 모든 당사국들은 수백만명의 식량이 달린 흑해 곡물수출 협상을 위태롭게 하는 어떠한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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