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 "대체 복무때 요양병원서 치매환자 케어, 침흘리고 얼굴에 흙칠 기이하지 않아" [인터뷰M]
영화 '고속도로 가족'으로 상상 이상의 파격 연기를 펼친 정일우를 만났다. '고속도로 가족'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파노라마 공식 초청되며 화제를 모았고 이 작품에서 정일우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방문객들에게 "이만 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구걸을 해 식구들을 돌보는 가장 '기우'를 연기했다.
꽃미남 배우의 대표 얼굴이었던 정일우는 이렇게 파격적인 변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고 나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 작품을 하기로 한 건데 이건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고 하면 죽도 밥도 아니라 생각해서 더 망가지고 싶었다."라며 오히려 더 망가지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캐릭터 '기우'를 연기한 정일우는 "감독님께서 걱정을 하는 저에게 "하이킥의 윤호라고 생각하고 연기하세요"라고 하셨다. '기우'는 초반에는 밝은 모습이 있는 친구다. 왜 '하이킥'의 윤호를 말씀하셨나 의아했는데 아빠의 천진난만함, 현실에서 도피해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그들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모습이 필요했더라. 그렇게 행복한 모습이 잘 보여야 이후의 대비가 확실히 되고,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위험과 불행을 행복과 사랑이라고 포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을 거 같았다"라며 캐릭터의 초반 설정을 어떻게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이 캐릭터를 연기하며 정일우가 걱정한 건 정말 많았다. 특히나 후반부의 상항에 대해 혹시나 빌런처럼 보이면 어쩔까 걱정이 컸다는 그는 "가족들이 잘 살고 있는데 가서 다시 나오라고 하는 게 빌런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님이 '나를 믿고 가보자'라고 하시더라. 아직 빌런으로 보인다는 반응은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하며 "'기우'는 아이들과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중 최선을 찾다 다녔던 인물이다. 도피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힘들었던 인물이지만, 정말 행복하고 삶에 만족하며 나름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캐릭터를 해석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과연 '기우'가 도덕적으로 괜찮은 아빠인 건지, 부모로서 방임하는 건 아닌지, 더 나아가 또 다른 종류의 학대나 가스라이팅을 하는 건 아닌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하지만 정일우는 이런 관객들의 생각들을 먼저 예상하며 캐릭터를 만들어 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기 쉽지 않을 것이지만 정신적 아픔이 있는 사람이어서 가능하다 생각했다. 정신과 선생님과 인터뷰도 많이 찾아보고 상담도 많이 들어봤다. 큰 충격이나 아픔으로 병이 생기는 분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제 캐릭터를 구축했다. '기우'의 증상을 어떤 병명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초반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보통 아픔이 있는 분들은 의지하는 가족이 있을 때는 정상이지만 뭔가 충돌이 생기면 극단적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거라고 하더라."라며 정신과 의사와의 많은 상담과 조언을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었음을 이야기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2만 원을 구걸하는 설정에 대해 정일우는 "금액으로도 고민을 했다. 만 원으로는 4인 가족이 밥 먹기 힘들었고 2만 원 이상을 빌리면 진짜 신고를 당할 것 같고, 내가 혼자 가서 2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면 성공 확률이 높아질 것 같고.. 이렇게 회의를 통해 2만 원이 정해졌다."라며 금액 설정의 비하인드를 밝혔다.
또 2만 원을 빌려야 하는데 너무 노숙자의 비주얼이면 안 빌려줄 것 같아서 최소한 멀쩡하게 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 감독이 직접 동묘에 가서 의상을 구해왔다고 하며 "노숙인 같으면서도 화려한 티셔츠로 세팅해서 젊은 가장의 느낌을 살렸다. 극 중에 신고 나온 운동화는 실제 제가 고등학교 때 산 20년 된 등산화였다. 낡아서 밑장이 너덜 했는데 의상팀에서 더 헤지게 만들었다"라며 의상에 얽힌 비하인드도 공개했다.
아이들을 이용해서 구걸하는 거 아니냐는 비난에 정일우는 "영화를 보시면 제가 애들을 끌고 오지 않고 애들이 자발적으로 온다. 아빠가 너무 돈을 못 가져오니까 애들이 도와주려고 온 것. 5년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그게 죄를 짓는 건지 놀이인 건지 판단을 못할 상황이 된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극 중에서 아내와 이별하고 나서 더 극심하게 망가지는 '기우'의 모습은 정일우의 팬들에게는 정말 충격적이다. 물론 초반에 휴게소에서 노숙하며 2만 원을 구걸하는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그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외적인 망가짐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정일우는 "얼굴에 진흙을 바르는 장면은 롱테이크로 8~9분을 촬영했는데 영화에서는 짧게 나왔다. 그냥 그러는 게 아니라 버섯을 먹었는데 환각이 와서 컨트롤이 안되는 상황인 거다. 부성애와 가족애가 큰 인물이라 뭔가에 홀린 듯 쥐불놀이처럼 불을 돌리며 가게 되는데 정신을 잃고 혼미한 상태에서도 딸의 목소리에 불을 내려놓게 되는 그런 캐릭터였다. 침을 흘리는 장면도 원래는 전기 충격기를 맞고 혼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침 흘리고 진흙칠을 하는 정도는 사실 예전에 대체 복무를 할 때 요양병원에서 근무했는데 거기서 치매환자들을 케어하며 봐온 게 있어서 기이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오히려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전혀 경험이 없는데도 애절한 부성애 연기를 했던 것에 대해 정일우는 "따로 계산해서 연기한 건 없다. 촬영 전 두 달 동안 아이들과 스킨십을 정말 많이 했다. 저희가 끌고 간다고 되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하는 행동과 말을 잘 들어주고 받아주면 좋은 장면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려고 했다."라며 특별한 연기 비법은 자연스러운 스킨십뿐이었다는 말을 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며 찍었겠다 싶은 영화였다. 많이 힘들었겠다는 이야기에 정일우는 "혼자 있는 게 외롭고 온전히 저 혼자 감당하고 감내해야 해서 가장 힘들었다. 그게 '기우'의 감정이라 생각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매일 밤새우며 연기하는 게 익숙해서인지 그런 건 안 힘든데 감정의 폭이 넓어 밸런스를 잡는 건 힘들었다. 많이 걷고, '기우'는 어떤 감정일지 많이 고민하고 연기했다."라며 육체적인 힘듦보다 정서적인 힘듦이 컸음을 강조했다.
그는 "작품 할 때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하는지, 그리고 더 고통스럽고 힘들어야 캐릭터와 접점이 빨리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장면은 도망가서 길거리에 쓰러져있다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행동이었다. 감독님께서도 그 장면이 못 살면 우리는 망한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표현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장면 찍고 나서 감독님이 '됐다!'라고 해서 마음이 편해졌다."라며 가장 신경 쓰며 찍은 장면을 언급했다.
인디 영화를 좋아하고 마음을 울리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정일우는 "잔잔하고 여운이 남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가 좋다. 데뷔 17년인데 배우가 안주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정체되고 무너진다. 계속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작품을 제안받는 입장이다 보니 운도 필요하다. 이런 역할이나 이런 영화를 찍고 싶은 욕망과 갈망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꿈을 이룬 거 같아서 감사하다. 앞으로는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다양성 영화에 출연하고 작업하고 싶다."라며 드디어 원하는 결의 작품을 하게 되었다며 만족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정일우는 "흥행 여부를 떠나서 정일우가 이런 캐릭터를 할 수 있는 배우였다는 걸 알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영화하면서 딱 그거 하나 기대했다. 드라마에서 항상 재벌집 아들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도 할 수 있는 배우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건 보여드린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만족한다."라며 영화를 추천했다.
iMBC 김경희 | 사진제공 9아토엔터테인먼트·제이원인터내셔널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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