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이 감탄한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 추억과 위로를 연주하다 [인터뷰]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 오마주 등
38세, 96세…나이 뛰어넘은 우정 돋보여
그랜드·업라이트 두 대 피아노로 각각 녹음
어린시절 추억과 아이슬란드 향수 등 녹여내
2023년 세계 투어 계획…"한국 자주 가고파"
현재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어 매일경제와 영상 인터뷰로 만난 그는 "제 음악적 뿌리, 음악의 DNA를 담은 음반"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필립 글래스'(2017), '바흐'(2018), '드뷔시-라모'(2020), '모차르트'(2021) 등의 음반에서 따뜻한 선율과 창의적 기획력을 선보였던 바. 우리나라 출신 세계적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 바흐 앨범을 듣고 지난 2020년 한 인터뷰에서 "정말 굉장한 앨범"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올라프손이 이번엔 '음악적 영웅에 대한 헌사'가 듬뿍 담긴 음반을 냈다. 특히 음반에 수록된 모차르트, 바흐, 슈만 등을 제치고,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96)을 가리켜 "음악의 정수를 표현하는 거장"이라고 존경심을 표했다.
이밖에도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아이슬란드의 '아베마리아'와 민요, 아내와 함께 연주한 바흐의 트리오 소나타 1번 등을 수록해 의미를 더했다. 음반엔 두 장의 CD가 들어있는데, 같은 트랙 리스트지만 한 장은 그랜드 피아노, 다른 한 장은 업라이트 피아노로 녹음한 독특한 구성이다. 그와 이번 음반에 대해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어린 시절의 음악적 여정을 음반에 담았다고.
▶음악가로서의 내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됐다.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에 갑작스럽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가난한 음악학도였던 부모님은 아주 적은 돈을 물려받았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살 집부터 마련할 텐데, 우리 부모님은 가지고 있던 돈에 대출금을 조금 얹어서 그랜드 피아노를 구입하셨다. 부모님은 음악을 우선순위로 삼으셨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적으로 참 로맨틱하다. 내가 태어났을 땐 두 누이와 함께 다섯 가족이 작은 지하 방에서 살았는데, 그랜드피아노가 그 방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 칠 일이 많았겠다.
▶어릴 때부터 연주하게 된 것은 맞지만, 그랜드피아노는 음악을 가르치던 어머니와 그 학생들, 건축가이자 작곡가셨던 아버지가 항상 차지하고 있었다.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없어서 불평도 많이 했다. 그러다 7살에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됐을 때 부모님이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장만해주셨다. 아주 오래되고 거의 망가진 피아노였지만 난 바로 사랑에 빠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줬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두 가지 버전으로 녹음해 앨범을 구성했다.
-수록한 곡들도 특별한 영감을 준 곡들인가.
▶어린 시절 내게 깊은 영향을 준 작곡가와 작품들, 내 어린 시절과 가까운 것들을 골랐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는, 지금까지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활동 중인 96세 음악가 죄르지 쿠르탁에게 보내는 편지라고도 볼 수 있다. 작년에 쿠르탁을 처음 만나뵀는데, 만났을 때 깊은 교감을 느꼈다. 쿠르탁의 작품 중에 7곡을 선정해 수록했다. 이 곡들은 제 음악적 뿌리이자 음악의 DNA를 담고 있다.
-워낙 세계적인 작곡가인데, 쿠르탁의 어떤 면모를 특히 닮고 싶나.
▶나는 쿠르탁을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곡을 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의 정수를 표현하는 거장이다. 어느 음 하나에도 전혀 낭비가 없다. 그는 시와 음악을 연결한다. 하나의 단어와 음, 고요함 등을 적절히 활용해 음악을 만든다. 쿠르탁의 작품에선 두세 개의 음만으로도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작곡가들이 수천개의 음표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고유한 특징이다. 전세계에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음반이 발매되고 부다페스트에 있는 그의 집에 직접 찾아갔다. 일단 쿠르탁은 너무 좋아했고, 음악적으로 모든 것에 만족해 했다. 헝가리 쿠키를 잔뜩 주셨다. 최근 자신의 바흐 트리오 소나타 편곡 악보를 출판하면서 제게 헌정한다는 문구를 넣으시기도 했는데, 매우 깊은 영광이다.
단 한 가지, 쿠르탁이 불평한 게 있다. 이번 음반에 아내와 함께 연주한 곡이 있는데 연주가 훌륭한데도 왜 음반 소책자에 아내 사진을 넣지 않았냐고 불평하시더라.
-쿠르탁도 부부 듀엣을 자주 선보였는데, 아내와의 합주도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나.
▶그렇다. 이번 앨범 자체가 쿠르탁에게 헌정하는 앨범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내 마르타에게 저희 부부가 보내는 경의의 표현으로 바흐 트리오 소나타 1번을 아내와 같이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쿠르탁은 2019년 세상을 떠났다.) 사실 집에서도 쿠르탁의 곡들을 자주 연주한다. 앨범에 담은 쿠르탁 곡들은 개인적으로도 제게 큰 의미가 있는 곡들이다.
-아내와의 콘서트 계획이 있나.
▶이미 이번 음반 수록곡을 들려드리는 연주회를 녹음했다. 도이치 그라모폰(DG) 스트리밍서비스를 통해 11월 중 공개될 예정이고, 아내와의 연주도 포함돼있다. 7년 전 다른 곡을 아내와 연주한 무대가 아이슬란드 TV를 통해 방영된 적도 있다.
[비킹구르 올라프손과 아내 할라 오드니 마그누스도티르의 2015년 모차르트 소나타 듀오 연주. 아이슬란드 국영방송 채널 'RUV'에 방영됐다.]
-클래식 앨범에 헝가리·아이슬란드 민요를 실은 점도 독특하다.
▶민속음악은 어느 한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그 지역과 문명의 경험을 응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백년간 이어져온 공동의 감정이자 기억이다. 할머니를 통해 손자·손녀에게, 또 그들의 손자·손녀에게……. 구전되고 이어진다. 곡이 처음과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런 부분도 오히려 민속음악의 멋진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정체성이 자신의 음악세계에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
▶자신이 속한 환경을 통해 누구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결국 우리의 문화를 정의하지 않나. 아무리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또 그런 식의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영화나 책,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때의 영향은 단편적인 것이고, 진짜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때는 어떤 한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모차르트의 '주를 찬미하라'와 아이슬란드 작곡가의 '아베마리아'를 편곡했다.
▶두 곡 모두 '기도'에 관한 노래다. 한 곡은 모차르트가 만든 기도, 또다른 곡은 아이슬란드의 기도다. 아베마리아(칼달론스 작)는 제가 아주 어릴 때 편곡했던, 오래된 편곡 작품이다. 꼭 두 기도를 연결해서 싣고 싶었다.
모차르트 곡의 경우 원곡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의 조합으로 완성되는 아름다운 선율을 가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멈추지 않는 선율 또한 특징이다. 기도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점을 표현한 듯하다. 이걸 열 손가락의 피아노로 표현하고 싶었고, 편곡 결과 결과적으로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아이슬란드의 아베마리아는 너무나 아름다운 곡이고, 아이슬란드의 정서를 잘 담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슬란드인 외에는 잘 몰랐떤 곡이다. 이번에 음반이 공개되고 수백만 스트리밍 수가 나와서, 그 메시지가 한국은 물론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것 같아 뿌듯하다.
-편곡해 실은 곡은 총 세 곡이다. 또다른 한 곡,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아다지오'를 편곡한 계기는.
▶반복적인 리듬과 고요함이 특징인 곡이다. 매우 아름답고, 들었을 때 최면에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매혹적인 곡이라고 항상 생각해 오랫동안 피아노를 위한 편곡을 생각해왔다. 특히 이번엔 마르타 쿠르탁에 대한 추모 차원에서 이 곡을 정했다. 원곡이 가진 하모니와 깊이를 최대한 표현해보고자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곡과 편곡 모두 좋은 곡이다. 원곡의 차선이 아니라, 편곡에도 원곡에 없는 참신함,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은 이후라 그런지 위로의 의미가 부쩍 느껴지기도 한다.
▶추모나 애도에 대한 의미를 특별히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 자신의 내면과 고요, 평화를 찾지 않았나. 저 역시 최근에 소중한 분을 잃기도 했다. 수록곡을 꼭 구체적인 이유를 가지고 일일이 고른 것은 아니지만, 듣는 누군가는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앨범명 '프롬어파'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나.
▶'먼 곳으로부터' 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한 개인으로서 어딘가에서 온 사람들이잖나. 저는 북아일랜드의 아이슬란드란 나라에서 왔는데,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과 적은 인구가 특징인 곳이다. 아이슬란드에선 나 혼자만 있는 공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화산도 도처에서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아이슬란드만의 공간감이랄까 고요함을 음반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음반 표지에서도 마치 화성이나 다른 행성, 지구가 아닌 어떤 곳처럼 보이는 아이슬란드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항상 남다른 기획력을 보여준다. 다음 행보 구상을 귀띔해줄 수 있나.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걸 즐긴다. 다음 앨범도 혼자서 하는 피아노 솔로지만, 뭔가 거대한 것을 준비 중이다.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만 하는 단독 연주회 음반이다. 너무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이지만 어떤 곡인지는 미리 알려드리지 않겠다.
-내한 공연은 언제쯤.
▶한국 팬들이 '언제 오느냐'고 많이들 묻는다. 2023~2024년에 준비 중인 다음 음반으로 전세계 투어 공연을 할 예정이고, 한국에도 갈 생각이다. 맛있는 한국 음식을 기대하고 있다.
[정리 =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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