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이 ‘불법파업 조장법’? 직장인들에게 물어보니
“네? 그만 나오라고요?”
한 카드사의 2차 하청업체에서 IT개발자로 멀쩡하게 일하던 A씨에게 어느 날 느닷없는 해고 통보가 날아왔다. 카드사와 새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하고 있던 차였다.
“미안하다, 그게···” 사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A씨는 예전에도 이 카드사와 프로젝트를 했었는데, 그때 A씨를 유독 미워하던 카드사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이 이번 프로젝트 참여자 명단에 A씨가 있는 것을 보고 A씨의 회사에 압력을 넣었다고 했다. 원청 직원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말 한 마디’에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은 원청의 갑질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적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노동자의 낮은 처우가 정당하지 않다’ ‘원청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등에도 90% 이상이 공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의 취지에도 10명 중 8~9명이 공감했다. 직장인들의 여론은 노란봉투법이 ‘불법파업 조장법’이라거나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법’이라는 정부여당·재계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한마디 했다고 ‘일당 0원’···90.8% “원청 갑질 심각”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여론조사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10월14일~21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원청갑질과 손해배상 특별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30일 밝혔다. 응답자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취업자 인구비율 기준에 비례해 배분했다. 신뢰수준은 95%, 표본오차는 ±3.1%포인트다.
‘원청 갑질’은 한국 직장인 대다수가 겪는 현실이었다. 조사 결과 직장인 78.7%가 ‘원청의 갑질을 겪거나 목격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차별의 종류는 ‘임금 차별’이 62.5%로 가장 높았다. ‘위험업무 전가’가 56.3%, ‘휴가일수 차별’이 52.3%, ‘명절선물 차별’이 50.6%으로 뒤를 이었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사무직보다는 비사무직에서 응답이 조금씩 더 높았다. 특히 건설업은 임금차별을 경험·목격했다는 응답이 81.7%에 달했다.
직장인 대부분은 원청의 갑질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원청 갑질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직장인에게 ‘대응 방식’을 물으니 절반 이상인 53.7%가 ‘참거나 모르는 척 했다’고 답했다. ‘회사를 그만뒀다’가 21.1%, ‘개인 또는 동료들과 항의했다’는 21.0%뿐이었다.
이처럼 노동자 다수는 원청의 부당한 대우에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입도 뻥끗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원청이 사실상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입 화물 하역·적재를 하는 회사의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B씨는 원청 직원에게 정당한 요구를 했다가 임금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원청 직원이 멀리 떨어진 다른 창고 작업을 요구하자 ‘교통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원청회사 직원이 ‘일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며 소리치고 화를 내는 거예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날 일당이 들어오지 않았더라고요.”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직장인들은 ‘원·하청 관계가 불공평하다’는 데에 매우 공감하고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 90.8%가 ‘원청의 갑질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응답했다. 92.6%는 ‘하청노동자가 받는 처우가 정당하지 않다’고 했고,. 85.6%가 ‘원청회사가 하청회사에 정당한 비용을 지급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도 90.5%로 매우 높았다. ‘원청회사에게 교섭 참가를 의무화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에는 86.6%가 동의했고 ‘상시·지속 업무의 정규직 채용 의무화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에는 83.6%가 공감했다.
“불법파업 조장법”이라는 여당···직장인들 “아닌데요?”
올해 일어난 하청·특수고용노동자들의 주요 투쟁도 직장인 대다수에겐 남의 일이 아니었다. 2022년 주요 노동사건 인지도를 묻는 문항에서 직장인 88.6%는 ‘CJ대한통운 등 택배노동자 파업’을 안다고 답했다.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파업’은 68.2%가 알고 있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인지도는 63.2%,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 파업’ 인지도는 51.3%로 나타났다. 네 사건 모두 간접고용노동자들이 원청에 임금인상·처우개선을 요구했다가 원청의 ‘무시’에 부딪혔던 사건이다.
직장인들은 이들의 임금인상 요구에도 ‘지지한다’는 의견을 보냈다. 임금인상 지지 여론은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파업’에서 83.4%로 가장 높았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은 71.1%, ‘CJ대한통운 등 택배노동자 파업’은 68.8%,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 파업’은 64.5% 순으로 나타났다.
원청의 책임자성을 강화하고 과도한 손해배상·가압류를 제한하자는 ‘노란봉투법’의 취지에도 대다수가 공감했다. ‘법을 알고 있다’는 응답은 29.7%로 법 인지도는 다소 떨어졌다. 하지만 응답자들에게 개정안 원문을 제시하니 89.4%가 ‘사용자와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해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는 법안(노조법 2조)’에 동의했다. ‘파업 등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해 파괴와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경우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법안(노조법 3조)’에 대해서도 79%가 동의했다.
직장인 44.5%는 노란봉투법을 ‘하청노동자를 위한 법’이라고 인식했다. ‘불법파업을 조장하는 법’이라는 응답은 절반인 17.1%에 그쳤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38.4%를 기록했다. 현재 발의된 노란봉투법의 내용을 떠나 ‘올해 정기국회에서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응답은 88.1%로 매우 높았다. “노란봉투법은 불법파업을 조장하는 황건적 보호법(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사회적 합의를 받지 못할 것(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등 현 정부여당 인사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다.
직장갑질119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센터 공감)는 “원청이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데, 원청을 상대로 교섭이나 단체행동을 하지 못하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며 ”노란봉투법으로 원청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하청노동자들을 차별과 갑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지금 노조법은 하청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사실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원청의 교섭 거부로 일어난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노조나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고, 악의적인 손배청구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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