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n스토리] 황제와의 '100년 약속'…54년째 연중무휴 커피집
"커피는 대화의 열쇠"…에티오피아인 초청 축제 열어 수익 기부도
(춘천=연합뉴스) 강태현 기자 = "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한테 에티오피아 커피를 다 먹여보고 싶어요. 정말 건강한 커피, 정직한 커피, 기본에 충실한 커피요. 에티오피아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 알리고 싶기도 하고요."
강원 춘천시 공지천유원지 에티오피아 한국참전기념관 앞 카페 '이디오피아집'은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무려 54년째 커피 향을 풍긴다.
주인 조수경(62) 씨는 1968년 방한한 에티오피아 황제와 '100년 동안 하루도 커피 향이 안 나는 날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한 부모님의 뜻을 따라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8살 때부터 생커피콩을 가지고 놀았던 조씨였음에도 가업을 잇기란 쉽지 않았지만, "황제와의 약속을 저버린다면 이는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어머니의 설득에 21년째 커피 로스팅을 하고 있다.
어머니가 '신의'를 강조한 데에는 6·25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가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있다.
에티오피아군은 1951년 5월 1일 한국에 도착해 1965년 3월 1일 철수할 때까지 3대대 6천37명을 파병하고서 양구, 화천, 철원 지역에서 총 250여 회의 전투를 치렀고, 군인 657명이 전장에서 피를 흘렸다.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조씨의 외삼촌은 1968년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을 건립했고, 기념탑 건립 소식에 그해 하일레 슬라세 황제가 직접 전용기를 타고 춘천을 찾았다.
황제는 그때 조씨 어머니가 운영하는 이름 없는 커피집이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뜻을 담아 '이디오피아벳(집)'이란 이름을 선물했고, 조씨의 어머니는 '100년의 약속'을 했다.
조씨에 따르면 지금은 손쉽게 커피를 컨테이너로 수입하지만, 수입 커피가 '호화품'으로 분류되던 시절에는 커피를 들여오기조차 쉽지 않았다.
당시 조씨 부모님은 외교행랑을 통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커피를 들여왔고, 점점 사용하는 커피의 양이 많아지자 세관에 돈을 내고 커피를 수입했다.
'대한민국 최초 로스터리 카페 전문점' 이디오피아집은 이 같은 시행착오와 부침을 겪으면서도 반세기가 넘도록 단 하루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조씨는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황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게 문을 닫지 말라'는 유언을 따라 퉁퉁 부은 눈으로 가게를 지켰다.
커피 향만큼 진한 사연만큼이나 조씨는 커피 만드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이다.
조씨에 따르면 생커피콩이 햇빛을 어느 방향에서 받아 생산됐는지부터 커피를 만들 때 어떤 물을 쓰는지, 어떤 컵에 어떤 온도로 담기는지에 따라 맛과 향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사소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커피 맛을 좌우하고, 이를 느낄 수 있어야 좋은 커피를 선물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염색이나 화장 등 미각과 후각에 영향을 주는 것들을 멀리한 지 오래다.
남편이나 자식들의 '사랑해' 한마디보다 손님들의 '정말 좋은 커피 마시고 간다'는 말이 더 기분 좋다는 조씨는 손님이 커피를 남기면 '맛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맛볼 정도로 더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다.
조씨는 에티오피아 명절에 맞춰 한국에 사는 에티오피아인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축제도 12년째 진행하고 있다.
이날만큼은 커피를 반값에 팔고, 그 수익금은 에티오피아 대사관에 기부한다.
이달 초 열린 축제에도 500여 명이 찾았고, 수익금 약 2천만원이 모여 조씨는 이를 에티오피아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데 고스란히 보탤 예정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에티오피아 명예 대사로 활동하는 조씨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스크와 소독제 각각 3만개를 보내는 등 에티오피아 일이라면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이처럼 이디오피아집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집'처럼 편하게 방문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춘천 사람들에게도 애틋한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조씨는 "머리 흰 어르신들이 10대 손주한테 '내가 여기서 미팅해서 결혼했잖아'라고 말씀하셨는데 세대를 뛰어넘어 한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된 것 같아 감사하고 기뻤다"라고 웃었다.
이디오피아집에는 어느새 아들, 딸, 사위, 며느리까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로스팅한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분나'라는 잔으로 커피를 세 번에 나눠 먹어요. 첫 잔은 '나의 말을 한다'는 의미고, 두 번째 잔은 '너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이며, 마지막 잔은 '화합'의 잔이죠. 그래서 제게 커피는 대화의 장을 여는 문이예요."
반세기 넘게 황제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이디오피아집의 향긋한 커피가 오늘도 추워진 가을날 몸과 마음을 녹인다.
taet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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