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간] ⑬ "참치캔 따다 손 베인 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홍인철 2022. 10. 3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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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머리 맞대는 노인과 젊은이의 '동행'
세대 갈등 해소 비결은 '섣부른 계도 NO…소통, 또 소통'
선후배 함께 자원봉사 [SK 행복나눔재단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 역시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천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연합뉴스는 노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위해 개인과 사회,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15편에 걸쳐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①∼④편은 한국 노인의 실상과 실태를, ⑤∼⑩편은 공동체에 이바지한 노인들을, ⑪∼⑮편은 선배시민 운동과 과제 등을 싣는다.]

참치캔 뚜껑 [촬영: 홍인철]

(성남=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한 번에 고리를 당겨 여는 '원터치'식 통조림 용기.

중학생 A군은 참치캔 뚜껑을 따다가 날카로운 뚜껑에 왼손 엄지를 베었다.

생각보다 많이 베인 손가락에 피가 나자 급한 대로 종이 행주로 두 겹 세 겹 감싸 지혈을 한다.

"아이고 어쩌냐. 그렇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넌 왜 이렇게 매사에 조심성이 없냐"는 가족의 핀잔을 들었다.

신경을 곤두세웠음에도 다친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왠지 부끄럽고 아픈 내색도 못 하고 꾸지람에 억울하다.

A군은 "그 이후로 무섭고 두려워 참치캔을 따지 않는다"며 트라우마를 털어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헌구(75) 씨는 "철로 만든 참치캔 뚜껑은 매우 날카로워서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손이 베이는 경우가 많단다"면서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며 아이를 달랬다.

그러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뚜껑을 날카롭게 만든 회사와 이런 사고를 예견하고 있음에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은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품의 안전성 문제로 소비자에게 손해가 생길 때 제조자가 그 배상을 해야 하는 책임(PL.product liability)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A군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하고 억울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은춘 성남시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이런 위험성 때문에 한국소비자원이 알루미늄 포일 재질을 적용해 안전한 뚜껑을 만들어 쓰라고 통조림 업체들에 권고했지만, 이를 전면 도입한 업체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사고에 대해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한 청소년들은 (사고를) 개인 탓으로 돌리고, 대부분의 어른은 그들의 부주의함과 실수를 질책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선배시민은 이를 안전관리에 소홀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시민의 권리 찾기에 주목한다고 강조했다.

남한산성 오르는 할머니와 청소년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개인 잘못이 아니다'라며 사회 구조에서 해법을 찾는 이런 사례처럼 윗 사진은 소통의 중요성을 곱씹게 한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중원노인복지관에 다니는 신의선(76) 할머니와 고교생 B군이다.

B군은 3년에 걸친 코로나19 이후 '원격수업으로도 충분한데, 왜 꼭 학교에 가야 하나'하는 생각에 여러 차례 결석, 학교로부터 '특별교육' 징계를 받고 이 복지관에 사회봉사를 하러 온 이른바 '학교 부적응 학생'이다.

신 할머니는 어느 날 그런 B 군에게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이나 가자"고 제안했다.

왼쪽 맨 위 사진이 말해주듯 처음에 둘은 남남처럼 2m가량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산행에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B군의 입장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할머니와의 산행이 마뜩잖고 어색했을 것이기에 연인처럼 딱 붙어 걸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낙엽, 날씨 등을 소재로 중간중간 이야기를 하던 중 서먹함이 사라지자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B군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 다소 과묵했던 B군은 학교와 집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상을 꺼내놓기 시작하며 시나브로 마음을 열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어떤가!

오른쪽 사진을 보면 학생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B군은 할머니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친할머니와 나들이하듯 바짝 붙어 걷고 있다.

소통으로 '거리'가 확 좁혀진 것이다.

'남한산성 할매'로 불리는 신 할머니는 그간 청소년들과 함께 며칠씩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며 이들이 가정, 학교, 사회에서 잘 적응하도록 돕고 있다.

난타로 소통하는 어르신과 청소년들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가진 중원복지관의 노인들은 '그루터기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청소년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이들 노인과 청소년은 영화를 관람한 후 토론하는 '시네마 천국', 마을을 청소하고 돌보는 '플로깅', 동화구연, 서예, 난타, 캐리커처 그리기, 셀프 리더십 등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있다.

특히 이들 어르신은 학교나 사회에 부적응한 청소년들을 섣부르게 계도하기보다는 여러 구조적 문제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그래서인지 중원노인복지관을 거쳐 간 청소년 중에는 "올바른 어른이 되도록 하겠다. 좋은 말씀 감사했고 늘 건강하시길 바란다"는 감사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또 흡연으로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 이곳에 온 한 학생은 플로깅(조깅·산책하며 쓰레기 줍기) 활동을 하던 중에 "거리에 담배꽁초가 이렇게 많은 줄 정말 몰랐다"고 새삼 놀라며 곧장 금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박희진 중원노인복지관 부장은 "학교나 사회 부적응 청소년들에게 다짜고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눈물만 그렁그렁하거나 화를 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면서 "낙엽만 굴러도 까르르 웃고 한창 꿈을 펼칠 시기의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는 그들 개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난타나 서예, 영화, 등산 등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꿈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을 얘기하다 보면 연애 고민을 비롯해 별별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오고, 그 속에서 해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배 시민과 후배 시민 토론 [중원노인종합복지관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이현숙 한국방송통신대 사회복지학과장은 "지혜로운 어르신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젊은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문제는 사실 거의 치유된다"며 "오랜 세월 쌓은 경험과 지혜를 자기 안에 가지고만 있으면 쓸모가 없다. 어르신의 지혜는 공동체 안에서 관계와 소통으로 구현된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 활동을 매개로 서로 자주 만나면 세대 교감은 물론 청년과 어르신들 사이에 끈끈한 우정이 생겨 세대 갈등은 봄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며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ic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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