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

외할머니는 평생 닭고기를 드시지 않았다. 평생은 아니고, 인생의 어떤 시점 이후라고 해야겠다. 외할머니는 부잣집 따님이었다. 유복한 친정에서 고기반찬 먹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나, 시집의 살림은 짠 고등어자반도 쉽게 올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외할머니는 늘 거친 밥과 찬에 힘들어하셨을 테다. 그러다 아기를 가졌다. 임신은 놀라운 식욕을 모체에 요구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아궁이 앞에서 밥을 짓느라 불을 때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미를 잃고 방황하던 중병아리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왔다지 뭔가. 당신은 그 녀석을 목격하자마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힘겹게 털어놓은 그날의 술회를 그의 딸은 이렇게 전했다.
“당신도 모르게 병아리를 몰아 아궁이 불구덩이 속으로 휙 밀어 넣다시피 하셨다더구나. 넋이 나갔다고 나중에 말씀하셨지. 누가 볼까 봐 급히 그을린 병아리 털을 훑어내셨다고.”
털은 탔으나, 병아리가 익었을 리 없었다. 외할머니는 붉은 생살을 보고선 드시지도 못했고 죄책감이랄까, 비위가 상하는 부끄러운 반추랄까. 그런 것 때문에 그 이후 닭고기를 드시지 못했다. 안 드셨거나 못 드셨거나. 이미 고인이라 그 사정을 자세히 여쭐 수도 없다.
평생 무엇을 못 먹는다는 건 일종의 강력한 트라우마다. 내 친구도 한 사건 이후 평생 돼지를 먹지 않았다. 군대에서 돼지가 내는 비명소리를 들은 이후다.
“부대가 아주 컸어. 여러 대대가 모여 있는 부대라 수천 명이 우글거렸지. 우리 대대에서 잡았던 돼지 소리를 부대 뒤 높은 산에 있는 대공초소 근무자도 들었다고 하더군. 멱따는 소리라는 건 도시에서 산 애들은 그때 처음 들어봤을 거야. 분노랄까, 처절함이랄까 이런 표현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돼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모아 터뜨리는 소리 같았지. 아마도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장 구체적인 소리였달까. 훈련 때 ‘전장 소음’이란 걸 틀어주잖아. 포탄 소리, 빗발치는 기관총 소리. 그걸 죽음의 소리라고 생각했거든? 천만에. 한 생명이 내지르는 그 소리가 바로 진짜 전장의 소리였어.”
요즘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수십 년 전 군대는 그러고도 남았다. 산 돼지에게 종이로 덕지덕지 옷을 입혀서 전 부대원 앞에 묶어놓고 훈시를 했다.
“아아, 에 또. 이 돼지는 이번 대통령 부대 표창으로 내려온 각하 하사품이다.”
돼지는 대대 차트병이 정성 들여 쓴 글씨가 새겨진 흰 종이를 두르고 있었다. 마치 장사대회에서 황소의 몸에 둘러진 영광의 휘장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살아 있는 돼지를 잡을 숙련된 기술자가 부대 안에 있을 리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취사반을 관리하는, 진급 안 되던 말년 중사가 책임지고 돼지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고, 어떻게든 그 일을 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대대본부를 움직여 휴가증을 걸기도 했다. 옛날엔 시골에서 종종 돼지를 잡곤 했으니 자원 병사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그 병사가 예리한 칼로 일격에 동맥을 노릴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돼지를 잡아봤댔자 겨우 동네 형님이 칼을 들 때 보조나 했겠지. 병사는 기왕 칼과 무기를 들었으니 당연히도 어떻게든 돼지를 잡아야 했다. 휴가증도 걸렸고, 자존심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돼지의 길고 긴 비명은 그가 숙련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었다고 했다. 모두들 오랜 시간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니까.
난도질이나 마구잡이 몽둥이질로 한 생명을 쉽게 잡을 수 있으랴. 하기야 누가 그 병사를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군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날 저녁 메뉴가 ‘대통령 각하 하사품 돈육찌개’로 확정되어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다고 해야겠다. 돈육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는 산 돼지가 왔다는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문명의 시대에 산다. 돼지는 숙련된 전문가가, 마땅히 필연의 장소에서 잡았어야 했다(물론 옛날 군대였다는 걸 감안해달라). 내 친구의 트라우마는 그 무관심한 의도와 장소로부터 생겼다. 외할머니도 부잣집에 시집가서 배를 곯지 않았다면, 밥상에 얌전히 놓인 닭찜을 드실 수 있었다면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현장에 있어봐야 알게 되는 기분
어느 서양 나라에 ‘자가도축클럽’이란 게 있다. 자기가 먹을 고기는 자기가 잡아서 해결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지킨다(도축법의 저촉 같은 건 나도 잘 모른다). 그래야 덜 죽인다는 거다. 고기를 먹는 나로서는 어떤 견해도 여기에 보태지 못하겠다. 당신은 어떤가.
몇 년 전인가, 아시아의 어떤 나라에 갔다가 한 도살장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꽤 큰 소음이랄까, 웅성거림이랄까, 기묘한 소음을 듣게 되었다. 물론 도살장에 모인 돼지들의 소리였다. 그건 비명이라기보다 격한 호소랄까, 흥분한 외침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도살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트럭에 실려 온 돼지는 대기 장소에 마구 부려졌는데 안타깝게도 도살 현장과 대기실 사이엔 적절한 거리가 없었고 시야를 가리는 구조물도 없었다. 대기실의 돼지들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동료들을 목격하거나 감지할 수 있었다. 더 예민한 녀석들은 울었고, 그걸 듣는 다른 돼지들의 불안한 동조가 허허벌판에 지어놓은 도살장 밖의 무거운 밤공기에 섞여 퍼져 나갔다.
나는 한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 이 얘기를 어디선가 꺼냈다가, ‘동물복지와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나는 미련해서 그런 세련된 태도 따위는 모른다. 다만 그런 현장에 있어봐야 알게 되는 기분에 관한 말을 건네는 거다.
평생 회를 뜬, 흔히들 ‘칼잡이’라고 부르는 일식 요리사 친구가 있다. 그가 낀 어느 술자리에서, 요리사가 아닌 어떤 녀석이 이렇게 물었다.
“너 지금까지 고기 몇 마리 죽여봤냐.”
나는 순간적으로 뒤통수에 싸늘한 고압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묻는 데도 방식이 있다. 그가 물고기 살해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죽이는 일은, 밥하는 일에 연결되어 있다. 외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닭을 많이 먹어왔다. 아버지가 닭 목을 비틀거나, 시장 닭전에서 목이 날아가는 생닭을 보고 나서 상에 오른 백숙을 먹었다. 죽음과 요리, 그게 한 사람의 피와 살이 된다는 생의 일관된 과정을 체험으로 얻었다. 나 역시 생선과 산 오징어와 더러는 닭의 목을 칠 수 있다. 인간은 보통 무심한 도축, 요리 행위 사이에 일말의 번뇌 같은 게 없다. 그렇지만 나는 죽임을 생각한다. 생선의 목을 꺾든, 돼지를 잡든, 누군가 나 대신 죽여주는 일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 노동 덕에 우리는 깨끗한 부엌에서 즐거운(!) 요리를 한다. 외할머니가 병아리를 몰아넣은 사건은 결코 요리가 아닐 것이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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