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위안화 추락] 원화 동반 추락 우려…산업계 영향은 제한적
수출 영향 크지 않을 듯…항공·관광은 '엔저' 수혜 기대
(서울·세종=연합뉴스) 산업팀·박원희 기자 = 이웃 국가인 일본·중국의 통화 가치가 추락하면서 원화 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이 아시아 시장에서 빠져나가면서 이미 과거 위기 발생 당시 수준까지 떨어진 원화 가치가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원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해외 투자자금의 이탈과 수입 물가 상승 등 부작용을 수반한다.
하지만 원화와 함께 엔화, 위안화가 동반 하락하면 그나마 한국 기업의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되면서 항공·관광 등 일부 업계는 엔저에 따른 수혜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외국인 자금 유출·경기 둔화 우려 키워…"한국, 외환위기 위험에 더 취약"
30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 28일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달러당 1,421.5원에 마감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9월 말 1,400원대에 올라선 이후 여전히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를 기록한 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7∼1998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2009년 이후 처음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에 따른 달러 강세가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가운데 최근 엔화와 위안화 가치의 동반 하락이 원화 약세를 심화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엔저의 주요 배경에는 일본 중앙은행의 금융 완화적 정책이 거론된다. 일본은행은 경기 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미국과의 금리 차가 벌어지면서 자금 유출이 커지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해외 자금의 아시아에 대한 투자 비중이 줄면서 한국에서도 자금 유출 압력이 커질 수 있다.
위안화와 엔화 약세가 중국과 일본의 경기 둔화를 시사해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를 키울 수 있다는 점도 부정적이다. 이는 원화 약세를 추가로 부추기는 요인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대중(對中) 수출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3.1%였다. 지난해(25.3%)보다 줄긴 했으나 여전히 제1의 수출국이다.
원화 약세는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소비자물가 상승세를 확대할 수 있다.
올해 들어 지난 28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16% 떨어졌다. 같은 기간 달러 대비 역외 위안화는 12%, 엔화는 21% 각각 절하됐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교역 연관성이 높고 산업구조도 비슷하다 보니 주변국이자 경제 강국인 중국과 일본의 통화가 약세를 보이면, 원화도 같이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며 "물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태국에서 시작해 한국 등 아시아 전체로 번진 1997년 외환위기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엔화를 가진 일본이나 자본 흐름을 통제하는 중국보다 한국의 위험이 더 높다는 분석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지금 당장 외환위기가 온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엔화는 국제적으로 유통이 가능한 통화이고 중국은 외환을 통제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이 그들 국가보다 좀 더 취약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무역적자에다가 여행이 늘어나면 내년에 경상수지도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가계부채, 부동산 버블 붕괴 위험 등 펀더멘털(기초여건)로도 매우 민감한 시기"라며 "일본과 중국에 비해 한국은 외환위기 위험이 더 높다"라고 말했다.
산업계 영향 극히 '제한적'…항공·관광은 기대
최근 한국무역협회 조사 결과 한국과 일본의 세계 시장 수출경합도는 2015년 0.487에서 지난해 0.458로 줄었다.
수출 경합도는 두 국가 간 수출구조의 유사 정도를 측정해 경합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1에 가까울수록 경쟁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수출 상품이 차별화되고 제품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엔저가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조의윤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엔저로 수출 시장에서 일본 기업이 우리 기업보다 유리하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며 "대중국 무역적자 또한 환율 영향보다는 중국의 경기 둔화와 산업구조 변화 요인이 더 크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달러 대비 원화·위안화·엔화가 동반 약세인 상황에서 위안화와 엔화의 변동성이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산업계에서도 일본이나 중국 기업과 대부분 현지 통화가 아닌 달러로 거래하는 점을 감안하면 엔과 위안화의 약세가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반도체 사업은 대부분 달러 기반 거래다. 중국 현지에서 원자재를 구매할 때 위안화를 일부 사용할 수 있어도 비중은 상당히 적은 수준이다. 일부 반도체 부품을 일본 업체에 의존하지만 역시 달러로 거래한다.
다만 원화까지 동반 약세를 보이면서 국내 기업들은 환율 상승에 따른 수출 증가와 같은 채산성 개선 이점을 누리지 못할 전망이다.
고환율이 실적 상승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자동차 업계는 엔화와 위안화 약세가 지속될 경우 일본·중국 기업들이 유사한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엔저 현상의 경우 당장 판매에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수익성 향상이 마케팅 여력 상승으로 이어져 중장기적으로는 경쟁력 강화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자동차 업계는 아직 수출이 활발하지는 않은 단계라 위안화 가치 하락이 시장에서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반면 항공·관광업계는 업황 회복 측면에서 엔저 현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달러 강세로 해외여행 수요 위축이 우려되지만, 반대로 여행 수요가 일본과 중국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코로나 사태 동안 대부분의 일본 노선 운항이 중단돼 수익성이 크게 악화한 LCC(저비용항공사)들은 이번 운항 확대와 엔화 약세를 계기로 정상화에 한층 더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LCC 관계자는 "지금이 일본을 여행하기에 최적기"라며 "엔저가 이어진다면 일본 노선이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환율에 따라 엔화 차입금이 감소하는 부수적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달러와 비교해 엔화 차입금의 비중은 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노선의 경우 여전히 운항 규모나 탑승객 수가 많지 않지만 위안화 약세로 여행 수요가 점차 회복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엔저가 여행 심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맞다"며 "일본 여행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여행을 못 가더라도 환전이라도 하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라고 전했다.
다만 중국은 방역 조치를 완화한 여타 국가와 달리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만큼 위안화 가치 하락이 관광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체감되지 않는 상황이다.
hanajjang@yna.co.kr encounter2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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