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되는 ‘협치’ 윤석열은 왜 안 될까
야당 꺼리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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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석열 후보나 이재명 후보 누가 당선되든 여야가 대화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국회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거나 정당 경험이 전혀 없고 평생 검사를 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정치 실종 현상이 심각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범죄로 몰아 사정 국면을 조성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인 3월10일 당선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 민생을 살리고,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는 대통령과 여당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습니다. 국정 현안을 놓고 국민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겠습니다.”
당선 직후 인사니까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 엿새 뒤인 5월16일 임시국회 추경예산안 시정연설에서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은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국가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각자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는 다르지만,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손을 잡았던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저는 이 연설을 듣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졌던 것을 반성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쩌면 야당과 손잡고 정치를 잘할 수도 있겠다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까지 야당 의원이나 야당 지도부를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구걸하듯 영수회담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협치’란 말에 차갑게 반응한 대통령
지난 10월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은 무미건조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기자가 연설에서 ‘협치’가 빠졌다고 지적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이란 말은 안 썼지만 국회의 협력이 필요하고 협조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차갑게 반응했습니다. 오히려 민주당의 시정연설 불참을 비판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16일 연설 때는 푸른색 넥타이를 맸습니다. 10월25일 연설 때는 붉은색 넥타이를 맸습니다. 푸른색은 민주당, 붉은색은 국민의힘 색깔입니다. 대통령의 옷차림은 정치적 상징입니다. 저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시정연설을 앞으로 야당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읽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통령 선거 전에 제가 가졌던 애초의 불길한 예상이 결국 맞았던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전임자와 무척 대조적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국민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야당과 대화도 하지 않은 독선적인 정치인’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런 면모가 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대부분 이른바 보수 언론과 국민의힘에서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여야 대화’ 끈 놓지 않던 문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과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한 ‘협치 대통령’이었습니다. 취임식에서 “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뒤 곧바로 국회에 있는 야당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기억하십니까?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2018년 11월5일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첫번째 회의를 열고 12개 항의 합의문을 발표했습니다. 5당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김성태, 바른미래당 김관영, 민주평화당 장병완,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었습니다. 12개 항의 합의는 첫번째 “소상공인과 자영업,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법안처리 및 예산반영 등 모든 방안을 강구한다”를 비롯해서 주요 국정 과제를 포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찾아봐도 놀라운 내용입니다. 여야는 합의 내용을 예산안과 법안에 대폭 반영했습니다.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매우 오래전부터 추진해서 이뤄낸 정치적 성과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보기보다 무척 집요한 정치인입니다. 2012년 11월18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새정치 공동 선언문’을 보면 “경제민주화, 일자리, 복지, 남북문제, 정치개혁 등 5대 국정 현안에 대한 여·야·정 국정협의회 상설화”가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이 내용을 10대 공약에 포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2017년 대선에서도 문재인 후보는 여·야·정 국정 협의체를 주장했습니다.
“생각을 달리하는 정당들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해나가겠다. 여·야·정 국정 협의체를 상설화하겠다.”
2017년 5월10일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5월19일 청와대에서 여야 5당 원내대표와 만났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자유한국당 정우택, 국민의당 김동철, 바른정당 주호영,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참석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구성해서 여야 공통 대선 공약을 우선 추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2017년 7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 외교 성과를 설명하기 위해 청와대로 여야 대표들을 초청했습니다. 민주당 추미애, 국민의당 박주선, 바른정당 이혜훈,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불참했습니다. 북한의 도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던 2017년 9월27일에도 여야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가안보회의 위기관리센터에서 함께 브리핑을 들었습니다. 민주당 추미애, 국민의당 안철수, 바른정당 주호영,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홍준표 대표는 불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1월1일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서 또다시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운영을 촉구했습니다. 정말 집요했습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공영방송 장악 음모! 밝혀라!’ 등 펼침막을 내걸었습니다. 연설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좌석 통로로 퇴장하며 펼침막을 든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악수했습니다. 남북대화가 한창이던 2018년 3월7일 청와대에서 여야 5당 대표 회담이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홍준표 대표도 참석했습니다. 5당 대표는 민주당 추미애,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미래당 유승민, 민주평화당 조배숙, 정의당 이정미 대표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4·27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4월13일 홍준표 대표와 단독회담도 했습니다.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가 결실을 본 것은 2018년이었습니다. 2018년 5월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가 정국이 경색됐습니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선출된 것을 계기로 여야 대화가 재개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드루킹 특검을 받아들였습니다. 2018년 8월16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나 분기마다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실무 협의를 거쳐 마침내 2018년 11월5일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첫번째 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는 아쉽게도 단 한번의 회의를 끝으로 다시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나경원 의원으로 바뀌고, 2019년 2월 황교안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여야 관계가 악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7월18일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을 위해 여야 대표 회담을 했습니다. 민주당 이해찬, 자유한국당 황교안, 바른미래당 손학규, 민주평화당 정동영,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2019년 11월10일에는 문재인 대통령 모친상에 조문했던 여야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코로나19가 터진 2020년 2월28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사랑재로 가서 여야 대표들과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민주당 이해찬, 미래통합당 황교안, 민생당 유성엽,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2020년 총선 뒤 5월28일에는 민주당 김태년,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담했습니다.
결국 해법은 정치 그리고 대통령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나 원내대표들을 정말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야당 지도부를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정치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치인은 싫어하는 사람과도 만나서 대화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못 하고 있습니다. 둘째, 국정 지지율이 너무 낮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도층보다는 고정 지지층을 먼저 끌어모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생중계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국정 지지율이 얼마나 올라갈까요?
마무리하겠습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9월27일 국회 연설에서 정기국회 기간 민생법안을 협의할 여야 민생경제협의체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서 여·야·정 민생경제협의체로 확대해서 추진해야 합니다. 지금은 집권 초기입니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인입니다. 경제, 외교·안보 등 국정 현안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정치, 그중에서도 야당과 대화여야 합니다. 결국 정치로 풀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좀 배우시기 바랍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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