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람에게 더 친절한 기술 만들고 싶어 삼성전자 관뒀죠”
삼성전자, 서울대 박사 출신 86년생
“대기업 톱니바퀴 싫어 삼성 관뒀다”
사진으로 상처 깊이 분석하는 AI 개발
“치료 기록 공유하는 플랫폼 구축이 꿈”
바이오 헬스케어 기업인 로킷헬스케어의 채한주(37) 인공지능(AI)부문 사장은 올해 3월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국제 컴퓨터 비전 및 패턴인식 학술대회(CVPR)’가 로킷헬스케어가 투고한 임상 논문의 학술지 게재를 확정했다는 내용이었다.
CVPR은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와 국제컴퓨터비전재단(CVF)이 1983년부터 공동 주최한 국제 학술대회다. 학술지 권위를 판가름하는 기준인 임팩트 스코어(Impact score)는 지난해 기준 45.17점이다. 구글 스칼라에 따르면 국제학술지 네이처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 사이언스에 이어 세계 4위인 꽤 권위 있는 학술지다.
채 사장은 지난해부터 국내에선 고대 구로병원과 해외에선 미국, 터키, 인도 병원들과 협력해 피부에 발생한 당뇨발, 욕창, 화상의 상처 깊이와 넓이를 분석하는 AI를 개발하고 있다. 800건이 넘는 환자 데이터를 심층학습(딥러닝) AI에 학습시켰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상처 부위를 촬영하면 30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분석 결과가 나오는 수준까지 성능을 끌어올렸다.
CVPR은 매년 대면행사를 열고 그 해 채택된 논문 저자들이 현장에서 논문 내용을 설명할 기회를 준다. 채 사장은 올해 6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CVPR 2022에 참가해 9000명 넘는 사람들 앞에서 병변 분석 AI의 성능을 발표했다.
채 사장은 “최근 CVPR을 비롯한 세계 AI 학계의 ‘대세’는 자율주행이다”라며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의료 분야 쪽 발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막상 발표가 끝난 뒤엔 채 사장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발표 현장에서 상당한 호응이 있었던 것은 물론, 발표가 끝난 뒤엔 따로 채 사장을 찾아 병변 분석 AI 시스템에 대해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독일 글로벌 설비자재 기업 ‘지멘스’의 관계자는 1시간가량 질문을 던지며 큰 관심을 보였다고도 한다. 채 사장은 “’인간 친화적 기술’을 만들고 싶다는 대학 시절 꿈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생인 채 사장은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 평가받는 미국 카네기멜론대에서 전기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그 직후 삼성전자 UX(사용자 경험)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입사해 4년간 일하며 10여개 특허를 냈다. UX센터는 갤럭시 스마트폰, 태블릿PC에 적용될 사용자 편의 기능을 만드는 연구개발 조직이다.
하지만 공들여 개발한 기술로 특허를 내도 제품에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기업의 규모와 구조 상 기술 하나를 적용하는 데만 해도 수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자기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한 채 사장은 지난 2014년 삼성전자를 나왔다.
그는 ‘블루에그’라는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스버킷챌린지와 같은 공익 캠페인 홍보에 특화한 소셜미디어(SNS) ‘라이트업’을 개발했다. 그러나 라이트업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대형 SNS에 밀려 얼마 안 가 서비스를 종료했다.
스스로 소비자에 대한 이해와 기술적 숙련도가 부족하다고 느낀 채 사장은 서울대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에 진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국내 인간컴퓨터상호작용(HCI) 분야 최고 권위자인 서진욱 교수 밑에서 4년간 공부한 끝에 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졸업 직후 로킷헬스케어에 자리를 잡았다.
채 사장은 “이제야 제가 가진 기술과 능력을 온전히 사람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 이달 25일 서울 금천구 디지털로에 있는 사옥에서 채 사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一 삼성전자를 첫 직장으로 갔다가 지금은 헬스케어 산업에 계신다. 이력이 흥미로운데.
“자주 듣는 이야기다. 계기가 있다면 삼성전자와 같은 거대한 조직 안에서 내 뜻을 온전히 펼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삼성전자에 있을 때 UX센터라는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UX는 사용자 경험을 뜻하는 유저 익스피어리언스(User Experience)의 줄임말이다. 삼성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을 쓰는 소비자들의 사용 경험을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기술들을 개발해 제품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게끔 적용시키는 일을 하는 곳이다. 요컨데 편리한 기능을 만드는 부서라는 거다. 그런데 대기업 특성상 팀원들과 힘을 합쳐 열심히 만든 기술이 특허까지 받아도 제품에 적용되는 경우는 적었다. 거쳐야 할 의사결정 과정이 너무 많고 복잡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일하는 즐거움이 떨어졌다.”
一 어떤 뜻을 펼치고 싶었던 건가.
“내가 만든 기술로 사람을 돕고 싶었다. 돕는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인터넷 속도가 전보다 빨라지도록 최적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도 만족스럽다. 그래서 사실 헬스케어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이 신기하다.”
一 그런 뜻을 품게 된 계기가 있나.
“특별한 계기는 사실 따로 기억나는 게 없다. 카네기멜론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시절, 전동 휠체어 사용자들 몸에 욕창이 생길 위험을 감지해 의자를 적절하게 움직여주는 기능을 개발한 적이 있다. 전동 휠체어를 쓰는 환자들은 몸이 마비돼 한 곳에 오래 앉거나 누워 있다보니 몸에 욕창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냈다.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기술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게 재밌었다. 어찌 보면 성공한 ‘기술 덕후’인 셈이다.”
一 삼성전자를 관둔 뒤에는 무엇을 했나.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의사결정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고 기업 규모도 작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했다. 당시 아이스버킷챌린지가 한창 유행이었는데, 이걸 보고 공익 캠페인 홍보에 초점을 맞춘 SNS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아이스버킷챌린지 유행 여파를 타고 서비스 초기에는 나름 이용자 수가 괜찮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지배한 시장을 뚫을 수가 없었다.”
一 시장 상황이 너무 레드오션이었다는 건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장 상황을 떠나서 서비스 자체에 기술적인 부족함도 많았다. 삼성전자에 있을 때는 기존에 있던 시스템에 내 기술을 얹는 식이었는데, 이 경우는 아예 제로베이스에서 시스템을 구축했던 탓에 자잘한 오류도 많았다. 그러니 소비자 입장에선 더더욱 우리 SNS를 쓸 필요가 없었던 거다.”
一 그런 부족함을 느껴서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한 건가.
“그렇다. 카네기멜론대에 있던 시절에는 박사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빨리 산업계에 뛰어들어 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쉬운 게 아니었다.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을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잘 한 선택이었다.”
一 박사 과정을 걸으며 헬스케어 산업에 종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건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 어느 특정 산업 쪽에 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사 과정이 끝난 뒤 로킷헬스케어가 헤드헌터를 통해 먼저 제의를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원진과 면담을 했는데 점점 진지해졌다. AI를 활용하고자 하는 회사의 방향성이 뚜렷했고, 아직 직원도 아닌 내게 사업적으로 민감한 내용들을 공유했다. 무엇보다 헬스케어 자체가 기술로 사람을 돕는 산업 아닌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一 개발에 성공한 로킷헬스케어 AI에 대해 설명해달라.
“핵심은 병변의 넓이, 깊이를 사진 한 장으로 분석해내는 것이다. 사진도 비싼 고성능 카메라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면 충분하다. 환자들 사진을 찍는 건 수술실 안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어떤 상태의 환자를 어떤 식으로 치료했다는 자료를 쌓기 위함이다. 우리 기술을 의료진들이 쓰게 하려면 진료든 수술이든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행위들 사이에 아무런 불편함 없이 개입해야 한다.”
一 원리가 뭔가.
“요즘 나오는 웬만한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RGB-D(Red Green Blue-Depth)’라는 센서가 들어있다. 말 그대로 피사체 색깔은 물론 픽셀과 픽셀 사이 거리도 계산하는 소자다. 그 정보가 있으면 평면 사진을 갖고 3차원(3D) 지형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당뇨발, 욕창 등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려면 살 안쪽에 파고든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일단 파악해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로킷헬스케어 AI 시스템에 입력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 안쪽을 3D로 확인할 수 있다.”
一 환자 데이터가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한국은 물론 미국, 터키, 인도에 있는 병원에서 당뇨발, 욕창, 화상 등으로 피부가 파인 환자 데이터 818개를 구해 딥러닝 AI에 학습시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를 파악하는 데 쓰는 AI였기 때문에 전부 중증환자여야 했다. 그래서 데이터를 모으기가 정말 어려웠다.”
一 덕분에 CVPR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 아닌가.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모두 큰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 시스템의 완성도와 경쟁력에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 AI 학계에서 CVPR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세계 최고 학술대회다. 해외 진출에 더 박차를 가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一 현장에서 논문 발표도 한 걸로 아는데, 반응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나.
“CVPR이 논문을 채택하면 1년에 한 번씩 하는 대면행사에서 논문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다. 학술적으로는 사실 큰 성과지만 격한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최근 AI 학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자율주행이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올해 CVPR에 참석해 사이버트럭을 전시할 정도다.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정말 놀랐다. 독일 지멘스에서 온 관계자가 나를 쫓아와 1시간동안 이것 저것 물었다. 어떻게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어디서 데이터를 얻었는지 등 질문 공세에 진땀 빼면서 대답하느라 기억이 크게 남는다.”
一 이후 목표는 뭔가.
“우리 시스템을 사용하는 의료기관들이 분석 결과와 치료 경험을 다같이 공유하는 거대한 클라우드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병원 한 곳에서 일어나는 의료행위는 그 병원 안에서만 돈다. 치료 행위의 ‘민주화’가 일어날 수 없는 구조다. 의료 시설은 물론 기술에서도 큰 격차가 나는 이유라고 본다. 이런 상황을 바꾸고 싶다. 의료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의료 행위 데이터를 공유해 원격으로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기술은 인간을 위해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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