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유민주주의에 '자유'가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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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락될 수 있을까?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제약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 시대의 오래된 질문이지만 오늘날에도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논쟁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차별적 발언 규제에 과도하게 집착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이 더욱 뜨거워졌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일어나며 'PC충'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특히 올해 들어선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를 연신 강조하면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사실 우리의 '자유'(自由)라는 말은 서구 근대의 핵심 가치였던 Freedom(프리덤)과 Liberty(리버티)를 번역한 용어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정치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프리덤과 리버티를 자유로 번역해 수용했고, 우리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가져왔다.
일본과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 수용 과정을 치밀하게 연구해 온 김석근 박사(역사정치학자, 전 아산서원 부원장)는 "한국 사회가 1948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부족한 부분이 자유주의"라며 "자유주의의 기초 자체가 매우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굉장히 취약하고 어려움이 많다"며 "지금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 생활에 들어가 보면 잘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유'와 '통의'>, <개화기 '자유주의' 수용과 기능 그리고 정치적 함의>, <근대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마루야마 마사오에서의 '개인'과 '시민': '주체' 문제와 관련해서>, <마루야마 마사오와 자유주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등 많은 논문과 저작을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의 자유주의의 기초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김 박사는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단주의적 성향마저 강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식이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을 하지만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논쟁적이기 때문에 지금 개인의 자유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 역사가 미리 겪지 못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대립이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은 김 박사와 함께 우리가 자유의 개념과 자유주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그 기초를 살펴보면서 지금 시점에선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고찰해야 할지 이야기를 깊이 나눴다. 우리의 자유주의 사상 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일본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전후 일본 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통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봤다.
▶자유는 원래 동양 고전에 한자로 있던 말입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다'라는 뜻이었고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른 사람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 '방종' 개념과 가까워 부정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프리덤이나 리버티의 개념과 좀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후쿠자와 같은 메이지 시대 일본 사상가들이 그나마 의미가 가까운 한자어 자유(自由)를 프리덤과 리버티의 번역어로 채택했습니다. 후쿠자와는 당시 선진 서구의 핵심이 '문명의 정치'라고 강조하면서 자유와 자유주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주임의'(自主任意)와 자유(自由)를 같이 썼어요. 후쿠자와의 이같은 지적인 작업은 1860년대에 이뤄졌습니다. 조선이 개항도 하기 전에 자유를 이렇게 정리한 것이죠. 후쿠자와는 미국 독립선언문도 번역해 연구했습니다. 독립선언문에는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의 자유주의가 모두 압축돼 있죠. 후쿠자와는 미국 헌법도 번역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핵심 가치인 인민주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짝을 이루는 개념인 'Right'(라이트)는 '권리'(權利)가 됐죠. 원래 중국 고전에 있던 단어였는데, '利'가 이기적이고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 있어서 후쿠자와는 '權理'(권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길게 '權理通義'(권리통의)로 부르기도 했고, 줄여서 '權義'(권의), '通義'(통의)라고도 했습니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 통의를 그대로 가져왔죠. 후쿠자와는 조선에도 관심이 많았고,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과도 지적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통의는 <맹자>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이 당시 서양 용어를 번역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예 새로 만드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미 있던 단어들을 활용했는데, 그래야 지식인들한테 전달이 잘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통의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현실에서는 점차 權利(권리)로 굳어지게 됐습니다.
- 자유는 사실 '개인'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개인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는지도 궁금합니다.
▶Individual(인디비주얼) 개념은 사실 서양에서도 고대, 중세 때는 없었고 근대에 탄생한 거죠. 근대의 핵심 개념인데, 근대적인 의미에서 권리의 주체는 개인입니다. 이 개인이 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들고 질서를 만든다는 사회계약론이 나오게 되었고요. 그런데 동아시아에선 이런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후쿠자와는 '人'(인), '一身'(일신), '人의 一身'(인의일신), '人民一人'(인민일인), '獨一個人'(독일개인), '一個人'(일개인), '獨一個'(독일개) 등 다양한 표현을 썼습니다. 모두 궁극적으로 인디비주얼을 가리켰습니다. 獨一個人에서 一個人으로, 그러다 '個人'(개인)으로 결국 자리잡습니다.
인디비주얼 번역이 왜 이렇게 쉽지 않았는가. 일본 사회에서 개인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당시 일본 사회 질서는 유교적인 상하관계, 불평등한 관계로 이뤄졌었죠. 후쿠자와는 이를 '권력의 편중', '편중의 화(禍)'라고 했습니다. 일본 문명에는 치자와 피치자 두 원소만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디비주얼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던 것이죠.
- 자유, 권리, 개인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했습니까?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을 비롯해 박영효, 윤치호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후쿠자와 등 일본 사상가들로부터 배워 이 땅에 소개했습니다. '개인'이라는 용어는 1904년부터 쓰여졌고, 자유주의 용어는 1905년 이후 정착됐습니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자유주의를 서구 문명의 본질로 봤습니다. 이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없어졌죠. 자유와 개인 개념이 이해되고는 있었지만, 나라가 없어지니 관심이 완전히 민족, 국가, 애국으로 쏠리게 됩니다. 시대 상황상 개인으로서의 자각과 독립이라는 과제는 밀려났습니다. 개인의 유예, 이월이랄까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온전한 발현이 훗날로 미뤄지게 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1년부터 1925년까지 강렬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자유주의·민주주의 운동) 때는 개인의 자유가 강조됐지만 1926년 다이쇼 일왕 시대가 끝나고 일본은 초국가주의로 가버렸습니다. 이때부터 국민이라는 말이 가장 강조됐는데, 'People'(피플)은 사실 '인민'(人民)이지만 일본 그리고 한국에선 흔히 국민이라고 했죠. 일종의 'Nation'(네이션) 개념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도 결국 국민 속의 개인이고,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일본에선 국가 시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국민'(非國民)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개화기 당시 자유와 개인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제대로 성찰해 볼 시간과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군요.
▶그런데 애초에 개화파 지식인들도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한 배경에는 군주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잠재돼 있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봤을 때 왕이라는 존재, 고종과 민비는 무소불위였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목한 게 입헌군주제였습니다. 군주도 정해진 헌법에 따라서 통치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자유, 개인, 권리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윤치호는 영어로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 individual 단어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인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민에게 바로 참정권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계몽과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계몽이 돼야만 비로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자유주의 나아가서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해방 이후부터는 어떻게 됐나요? 대표적인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텐데요.
▶우리는 1948년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바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는 다른 것인데, 이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고요, 우리는 이 자유민주주의가 경험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주어져 버린 것이죠.
개인들에게 보통선거권이 바로 주어졌는데, 아시다시피 문제가 많이 생겼었죠. 서구에선 선거권이 인민들이 피흘려 투쟁해 쟁취한 것인데, 우리는 선거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잘 모르고, 갑자기 얻게 됐습니다. 이른바 '고무신 선거'가 안될 수가 없었죠.
때문에 한국 사회가 1948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부족한 부분이 저는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의 기초 자체가 매우 미약합니다. 물론 일본도 마찬가지였고요,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굉장히 취약하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금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 생활에 들어가 보면 잘 안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이나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구 역사에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치열했습니다. 자유주의가 먼저 강조됐고, 그에 도전하는 형태로 민주주의적인 욕구가 나오게 됐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근간에 있고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입니다.
자유주의에는 적들이 많습니다. 서구 역사에선 봉건세력과 종교세력이 첫번째 적이었고요. 동아시아에서도 전제 왕권과 유교가 그랬죠. 또 다른 적은 전체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같은 것이죠.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위협을 보게 되면서 민주주의적 요구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결국 나도, 너도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적 요구는 참여, 참정과 같은 요구로 나타나기 때문에 점차로 선거권의 확대, 나아가 보통선거권이 확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역시 자유주의의 근간에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덧붙여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격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타협과 제휴는 설령 그것이 서구 역사의 특수하고 우연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포퓰리즘까지 포함했을 때 '개인'이 그 결정적인 분기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개인입니다.
마루야마는 '자립화된 개인'(individualization)과 '민주화된 개인(democratization)을 구분했습니다. 자립화된 개인은 자주독립적이며 자립심이 강한데, 영국의 부르주아지나 미국을 건국한 퓨리턴(Puritan) 등이 거기에 속합니다. 민주화된 개인은 자발적인 집단과 조직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립화된 개인이 '자유'의 이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민주화된 개인은 '평등'의 이상을 강조합니다.
자립화된 개인은 시민적 자유의 제도적 보장에 관심을 갖는 반면 민주화된 개인은 특권을 없애고 민중의 정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민주화된 개인은 자립화된 개인보다 대중운동에 적극적이죠. 자립화된 개인과 민주화된 개인 사이의 갈림길은 민중, 대중운동, 평등에 대한 생각의 차이입니다.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일 것입니다.
마루야마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마루야마가 생각한 '자유주의의 확대로서의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도, 지금 현실적으로도 꼭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마루야마의 낙관적인 입장이 그대로 구현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구 근대사회가 체험한 가장 심각한 정치적 대립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의 대립이었습니다.
권력의 정통성 근거를 다수의 동의에서 찾는 민주제 하에서도 권력의 남용, 자유의 압살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다수의 지배를 배경으로 한 압제보다 더 강력한 위협은 없습니다. 개인과 민중·대중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합니다. 민중·대중은 사회 운동과 더불어 의식화되고, 과격해질 수도 있습니다. 과격한 민중과 대중, 다수의 전제는 개인의 존재와 위상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과 타협을 역사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는데, 냉전체제 하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자동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여겨졌습니다. 서구 정치사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을 뛰어넘었거나 이미 해결된 것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잠복돼 있습니다. 그 잠재된 폭발력은 어느 순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정치적 주체라는 측면에서 자유롭고 책임을 갖는 개인의 존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개인의 존재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인민주권론의 횡행은 개인의 존재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수의 선동으로 얼룩지는 과격한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포퓰리즘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개인의 존재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마루야마는 일본 정치사상사가 자유와 개인을 중시한 서구와 얼마나 다른지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유, 개인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마루야마는 개인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개인은 양심의 자유를 갖는 자유로운 인격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질서 혹은 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사회계약론이 근저에 깔려 있는 생각이죠. 마루야마는 무책임의 체계가 아니라 책임의 체계, 억압을 남에게 이양하지 않는 주체의 확립, 자유로운 주체의식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 개인의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 마루야마는 전체주의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이 이런 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마루야마는 도쿄제국대학의 조교수였는데 군대에 갔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초국가주의의 말단에서 직접적인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1945년에는 히로시마 쪽에서 단파방송을 듣고 정세 보고를 하는 군대생활을 합니다. 그때부터 국제정세에 밝게 되죠.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적, 집단주의적 속성을 체험하면서 마루야마는 양심의 자유를 갖는 개인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는데, 또 한번 큰 충격을 겪습니다. 자신이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가르쳤던 대학생들이 운동권 조직 전공투(전학공투회의)가 돼 폭력적으로, 파시즘적으로 혁명을 외치자 환멸을 느끼고 정년도 안돼 교수직을 떠납니다. 심지어 그들에 의해 자신도 감금을 당하기도 했죠. 그러자 마루야마는 저들은 나치보다 더 나쁘다고 비난했습니다.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요구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루야마도 그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역사를 근거로 들면서 개인의 자유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길준, 박영효 등도 서구 문명 발전의 원동력은 개인의 자유이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마루야마는 과도한 민주적 열망이나 인민주의적 욕구는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군국주의, 파시즘, 초국가주의, 우익 전체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포퓰리즘, 민중주의, 인민민주주의, 좌익 전체주의를 모두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개인이면서 시민이고, 시민이면서 개인인 정치적 주체'를 강조했습니다. 마루야마는 일본 사회에 자유로운 개인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갖춘 시민이라는 의식을 불어넣어 주려고 했습니다.
- 앞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과 갈등을 말씀하셨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항상 과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후쿠자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후쿠자와가 계몽시킨 세대들이 1880년대부터 자유민권운동을 벌였는데 프랑스 대혁명 수준의 인민주권까지 주장합니다. 굉장히 급진적인 것이었죠. 후쿠자와는 인민민주주의적으로 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았습니다.
후쿠자와는 정부에서 와서 일해달라고 해도 안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부에 들어가면 자신의 사적인 자율성을 해치니 밖에서 자립하겠다고 할 정도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그도 아무나 개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격과 요건을 갖춘 사람만 개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계몽과 교육을 중시했고, 그건 사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도 선거권을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주진 않았죠.
당시 제국주의 열강 경쟁의 국제정세가 이런 생각을 심화시켰습니다. 국제사회에서는 독립된 '국민국가'(Nation State)가 행위자였습니다. 개화 지식인들조차도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선 개인도 결국 국민 속의 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쿠자와도 점차 국가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만, 국민과 국가·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를 자주 언급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자유를 외친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원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억압받거나 탄압받는 사람들이죠. 미국이 독립할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패트릭 헨리라든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외치는 것인데요. 윤 대통령이 연일 자유를 외치는 게 처음엔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살펴봤더니, 우선 윤 대통령도 여러번 말했듯 지금 국제정세적으로 한미관계, 한미일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 연대를 강조하는 취지가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차원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이건 제 해석입니다만, 국내 정치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특히 지난 정권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보다 '민주주의'를 중시했는데, 실제로 그에 대한 반발도 있었죠. 그래서 이 자유에 대한 논의는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지난 정권 때는 '비(非)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가 아니였냐는 비판도 나왔고요, 좀 과격한 분들은 지난 정권 때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였다고도 하더군요. 즉 지금 자유민주주의와 비자유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을 합니다만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논쟁적이기 때문에 지금 개인의 자유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가 미리 겪지 못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듯하고요. 자유주의 주창 세력과 86세대 중심의 민주주의 주창 세력의 갈등이 더욱 두드러질 것 같습니다.
-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가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발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을까요?
▶정치사상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들 속에서 상상되고 형성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개인'을 알게 됐고, '자유'도 알게 됐습니다. 그렇기에 이걸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대로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횡포나 획일성의 위험 등은 이미 충분히 지적됐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 자유 같은 것은 그래도 꽤 확보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개인의 자유를 말하긴 그렇고, 정작 문제는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의지의 발전을 막는 것이죠. 개인의 창의성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적당한 획일화, 평준화로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개인이나 기업가의 창의성을 통해 사회와 경제가 발전해야 하는데, 국가가 획일적 규제와 통제로 개입하게 되면 근간이 흔들려 버립니다. 사회복지도 중요하지만 근간을 흔들면 안되지 않습니까. 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요구가 기성세대들과 부딪히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생각에 많이 공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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