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정치 누아르 ‘이재명과 사법의 시간’
정치의 시간이 가고, 사법의 시간이 시작됐다. 대통령선거 후 발생하는 ‘혼란’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현행 정치체제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선 패배 후 곧바로 당대표로 돌아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 자체로 정치적 뇌관이 됐다. 이 대표 본인과 측근들에게 쏟아지는 의혹이 곧바로 ‘야당 탄압’과 연결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위기는 곧 민주당의 위기라는 식이다.
사법의 시간을 이끄는 주역은 검찰이다.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 구속’, ‘민주당 당사 내 민주연구원 압수수색’, ‘정진상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출국금지’ 등을 실행에 옮겼다. 쌍방울 대북 사업 의혹과 관련해 이미 구속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사건 역시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별개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들 사건을 하나로 묶는 정점에 이 대표가 있다. 김용, 정진상, 이화영 등은 모두 이 대표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이 겨눈 칼끝에 이 대표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위기를 맞은 이 대표는 지난 10월 21일 자신을 둘러싼 ‘대장동 개발 사건’의 특검을 요구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후보군 4명을 추천하면 여야가 2명으로 압축하고, 대통령이 1명을 특검으로 최종 임명하는 방식이다. 정부·여당은 곧바로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특검 요구는 속이 뻔히 보이는 시간 끌기, 물타기, 증거인멸용”이라며 “특검 관련한 협상 자체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0월 24일 국정감사에 출석해 “수사받는 당사자가 마치 쇼핑하듯 수사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는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 중에는 없다”고 말했다.
‘특검’ 합의가 어려운 만큼 정치적 해법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여당 대 야당의 ‘강 대 강’ 대치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지난 10월 25일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대통령 시정연설에 제1야당 의원들이 전원 불참한 이례적 사건이다. 윤 대통령 대선 공약이기도 한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 2023년도 새해 예산안의 법정 시한내(12월 2일) 확정 등도 불확실한 상황에 놓였다. 정치권의 ‘죽느냐, 사느냐’식 대립이 정국을 뒤덮으며 당장 급한 ‘민생 문제’ 해결도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다시 시작된 ‘배신의 계절’
사법의 시간을 이끈 변곡점에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의 ‘석방’이 있다. 유 전 본부장은 지난해 10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및 배임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성남도시개발공사를 위해 일해야 할 유 전 본부장이 손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대장동 개발사업에 참여한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등에게 막대한 이익을 몰아줬다는 혐의다.
형사소송법상 1심 최장 구속기간은 6개월이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4월 유 전 본부장은 석방됐어야 한다. 검찰이 유 전 본부장에게 증거인멸교사 혐의를 추가해 기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법원은 추가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최장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더 이어가게 됐다. 유 전 본부장은 구치소에서 수면제 50알을 복용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다. 지난 10월 20일 자정, 유 전 본부장은 구속기한 만료로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동시에 대장동 개발을 둘러싼 의혹이 ‘특혜’에서 ‘불법대선자금’으로 판이 바뀌었다.
풀려난 유 전 본부장은 언론과 만나 “내가 지은 죗값은 받겠다. 같이 지은 죄는 같이 벌 받을 거고. 그 사람들이 지은 죄는 그 사람들이 벌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4~8월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 대표 최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에게 남욱 변호사가 마련한 8억4700만원을 전달했다고 검찰에 진술했음을 밝혔다. 폭로 하루 뒤 김 부원장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지난 10월 22일 새벽 구속됐다.
유 전 본부장 입에서 나온 이름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진상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에 관한 이야기도 쏟아졌다. 술접대를 했다는 것과 유 전 본부장이 검찰수사를 받을 당시 휴대전화를 버리라고 지시했다는 주장 등이다. 정 실장은 이미 검찰로부터 ‘성남FC 후원금 50억 관련 제3자 뇌물 수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대표가 성남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관할 기업들의 인허가 등의 민원을 해결해준 대가로 성남FC 후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남욱 변호사로부터 2014년 5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도 있다.
민주당은 유 전 본부장의 폭로를 두고 “검찰의 회유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은 “최소한 뭐에 회유되진 않았다”며 “내가 그들하고 10년을 같이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입 다물고 있기를 (그들이) 바랐던 것”이라며 김 부원장, 정 실장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각종 의혹에 대해 ‘이 대표도 알고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모를 리가 있겠느냐”며 “10년간 쌓인 게 너무 많다. 하나가 나왔다 싶으면 또 하나가, 그리고 또 하나가 나올 것이다. 급하게 갈 것 없다. 천천히 말려 죽일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까지가 유 전 본부장의 ‘주장’이다. 검찰이 수사단계에서 해당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확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유 전 본부장 주장대로 검찰수사가 움직이며 혐의가 마치 확정된 범죄처럼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명확한 물증 없이 단순 폭로, 검찰수사 내용만 알려지는 상황은 과거 정치 사건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며 “혐의를 받고 있는 주요 스피커의 폭로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민주당 측은 “정황증거뿐”이라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김 부원장 혐의의 핵심은 8억4700만원 수수 의혹이다. 돈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개입한 인물은 자금출처인 남 변호사(공여자), 전달책 역할을 한 이모씨, 정민용 변호사, 유 전 본부장 그리고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김 부원장(수여자) 등이다. 남 변호사, 정 변호사, 유 전 본부장까지는 “돈이 전달된 것은 맞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고 있다. 다만 세부적으로 보면 이들이 완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중간 전달자인 정 변호사 측은 “돈을 전달한 것은 맞지만 그 돈이 김 부원장에게 전달된 것인지는 모른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유 전 본부장과 김 부원장 사이에 8억4700만원이라는 돈이 실제로 이동했느냐를 입증해야 한다.
김 부원장은 대선자금 수수 의혹 자체가 조작이라며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검찰이 진술 외에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해 버티는 것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어떻게 정치자금을 받는데 돈 주는 사람 따로 있고 전달한 사람을 몇단계씩 거쳐서 받겠느냐”며 “김용한테 전달됐다고 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 실장 역시 유사한 상황이다. 유 전 본부장에게 휴대전화를 버리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또 성남FC 불법후원금 관련해서는 “이미 검찰·경찰의 소환에 응하여 수차례 조사를 받았고, 압수수색을 당해 휴대전화 등도 빼앗겼고 출국금지도 당했다”며 “검찰이 추가로 조사할 것이 있어 소환하면 언제든지 당당하게 응해 성실하게 조사를 받겠다”고 말했다.
결국 표면적으로 주장과 주장만 맞붙은 상황이다. 이들의 혐의가 범죄로 입증되고 나서야 이 대표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수사를 단기에 종결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은커녕 사탕 한개 받은 것이 없다”며 “대통령과 여당은 대장동 개발과 관련된 특검을 수용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의 정치적 운명이 국가의 운명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검찰수사가 이 대표를 겨눈 상황에서 이 대표의 요청이 호소력을 갖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내용은 있다. 검찰수사가 정국을 주도할 만큼, 민생문제가 만만한 상황인가 하는 점이다.
■막장 ‘정치 드라마’ 언제까지
검찰수사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 책임에서 이 대표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전 의원은 지난 10월 2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재명 대표님, 그만하면 됐습니다.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 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 10월 24일에는 “민주당의 단일대오가 그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단일대오에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 대표의 심복인 김 부원장에 대한 검찰수사를 당 전체가 변호하는 게 말이 되냐”며 “조작 수사라는 주장도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대표보다 검찰의 이른바 ‘망신주기’ 수사에 집중하는 목소리도 있다. 설훈 민주당 의원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표를 만나 ‘당에서 막을 테니 대표로 나오지 말라’는 주문을 했던 것”이라며 “(검찰이) 당사를 압수수색하겠다는 것은 나올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주당을 창피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상민 의원 역시 “이 대표에 대한 사법적 의혹은 이미 대선 때부터 줄곧 제기돼온 부분이며, 대선이 끝나면 패자는 혹독한 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누구나 예견을 했던 것”이라며 “다만 검찰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은 정치적 계략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문제는 검찰수사가 야당 대표를 정조준하는 상황에서 이 대표가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나기도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대선 때부터 사법리스크라는 단어를 들어온 이 대표 입장에서 명확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물러나기는 어렵다”며 “먼저 물러나면 국민은 이 대표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반발과 별개로 민주당은 겉으로는 총결집 양상이다. 지난 10월 26일 민주당은 국회의원, 원외지역위원장, 당직자, 보좌진 등 1200여명이 함께하는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었다. 내부 단속을 하고, 정부·여당에 맞서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날 발표된 규탄문에는 “이제 민주당이 행동해야 할 때다. 저열한 공작수사와 야당 말살 획책에 굴하지 않겠다”며 “무능과 거짓, 위선으로 점철된 무도한 정권에 맞서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을 담았다.
전문가들은 결국 이번 사태의 변곡점은 김용, 정진상 등의 수사에서 확실한 물증이 나오는 시점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단계로 수사가 진전된다면 ‘당대표’ 교체 등을 포함한 움직임까지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이 처리해야 할 주요 사안들이 ‘공전’한다는 점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수사가 상당 기간 지속되면 민생이나 경제위기 대처 등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치인들이 자신들 문제로 심각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갈등을 봉합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윤 대통령의 태도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한 지난 10월 25일 윤 대통령은 ‘국회를 겨냥한 비속어 논란’ 등을 사과하라는 요청에 “사과할 일은 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또 지난 10월 26일 출근길 문답에서 시정연설에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것을 두고는 “30여년간 헌정사의 관행으로 굳어져 온 게 어제부로 무너졌다”며 “앞으로는 정치상황에 따라 대통령 시정연설에 국회의원들이 불참하는 일들이 종종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30%대 초반대에 머물러 있는 상황, 각종 실책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는 시점에서 수사가 본격화됐다. 대치 상황을 마치 남의 일처럼 표현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현실감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교수는 “윤 대통령의 협치를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는 정치에 대한 무지로 볼 수밖에 없다”며 “정부 예산, 입법 등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지 이해를 잘 못 하는 것 같다. 결국 정치 실종으로 피곤한 건 국민”이라고 말했다.
싸우는 것이 전부인 ‘정치 드라마’가 또 시작됐다. 검찰발 수사정국은 수출·환율 등의 경제 문제, 북한을 둘러싼 외교안보 문제 등보다 더 주목받는다. 각종 위기 극복을 위해 전 세계가 총력전을 펼치는 상황에서 한국 정치권은 정부·여당과 제1야당 사이의 정쟁만 한창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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