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미안” 김진태 지사, ‘주연’과 ‘씬 스틸러’ 사이

서영민 2022. 10. 2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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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밖의 캐스팅 : 금융 아이템인데 검사 출신 도지사?

베트남 출장을 갔더니 '지금 나라를 이렇게 만들고 사진 찍으러 해외에 나갔냐'는 여론이 들끓는다. 사려 깊지 못한 판단으로 정부가 50조 원을 들여서 막아야 하는 금융 대혼란을 일으켰단 비판이다.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자 급거 일정을 당겨 귀국했다.

"조금 미안하다. 어찌 됐든 전혀 본의가 아닌데도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오니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검사와 의원 출신의 정치인이다. 지금은 강원도지사다. 뜻밖에 2022년 글로벌 긴축국면, 한국적 상황의 첨단에 섰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한마디 한마디가 기사 감이다.

김진태 강원도지사발 금융 대혼란, 영화를 만든다면 <빅쇼트> 같은 금융 블랙코미디가 된다. 그래야한다. 나라가 거덜 나는 이야기로는 가지 말자. <국가 부도의 날>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되면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 김 지사의 자리를 찾아보자.

■2. 뜻밖의 소품 : 칼인줄 알았는데, 라이터?

지난 9월 김 지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레고랜드를 짓느라 들어간 자금과 관련해 회생신청을 한다고 했다. 강원도가 안고 있는 2천억 원의 보증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다시 한번, 김 지사는 검사 출신이다.) 9월 이 기자회견 때, 김 지사는 검사 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손에 칼을 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임 도지사의 잘못된 행정(최문순 전 도지사)을 바로잡는다. 강원도엔 이익이 남지 않고 과도한 빚만 떨어지는 잘못된 사업구조, 정의롭게 단죄한다. 강원도가 진 '부당한 빚'은 가볍게 한다. '단죄의 칼'을 든 '검사 같은 행정가'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칼을 들었다고 생각한 팔을 휘둘렀는데, 갑자기 펑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분명 강원도 지방행정 상의 정치적 행동이었는데, 서울 여의도 금융시장이 발작을 일으켰다. 기업 자금 조달시장, 단기자금 시장이 순환을 멈췄다. 내년 분양시장 '최대어'일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조차 자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알고 보니 김 지사 주먹에 쥐어있던 건 칼이 아닌 라이터였다. 그리고 장소는 강원도가 아닌 유증기 가득한 여의도 채권시장 객장이었다. 부싯돌이 마주치며 불꽃을 일으키자 유증기가 화학적 폭발 반응을 일으켰다.


■3. 뜻밖의 장소 :강원도인줄 알았는데 서울 여의도 채권시장

갑자기 초청된 채권시장, 지난 1년간 이 시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떤 곳이길래 폭발성 유증기로 가득했나? 등장인물로 알아보자.

회사채는 1년 이상의 장기 자금이 오가는 시장이다. 장기채권이다. 이 시장에선 원래 돈 빌리기가 어렵다. 신용이 무척 좋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 우선 등장한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올 초 이후, 이 시장에서 돈 빌리는 건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은행들'과 '한국전력'이란 등장인물도 나타난다.

금리가 앞으로 계속 오를 것 같으니 은행들이 은행채(사실상 정부 보호막 안에 있으니 초우량 등급이다)를 발행한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채권시장에서 전주들 돈을 빨아들인다. 한전도 거대한 규모의 채권(역시 정부 보호막 안에 있으니 초우량 등급이다)을 자꾸 발행한다. 국제 원유는 비싸지는데 정부가 허락하지 않아 전기요금 못 올리니 적자 경영하게 됐다. 기름 사 올 돈은 이렇게 채권시장에서 빌린다. 이 두 초우량 등급 공룡이 자리 잡자 장기채 시장은 비좁아졌다. 안 그래도 금리는 계속 오르고 자금조달은 더 어려워졌다.

1년 이하, 주로 석 달 이하의 단기채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최근 2~3년 이 시장은 증권, 보험사들의 '노다지 밭'이었다. 등장인물은 '부동산업자들'과 '증권사'다.

워낙 부동산 시장이 활황이다 보니, 너도나도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다. 자금은 이 단기채 시장에서 조달했다. 부동산 업자들은 ABCP(AB는 자산 유동화, CP는 어음, 자산 유동화 어음이다)같은 영어 약자로 된 다양한 단기채 상품을 증권사 도움(보증) 등으로 발행했다. 빌려주는 쪽도 좋았다. 석 달만 지나면 꼬박꼬박 비교적 고율의 이자가 들어온다. 시장에는 돈이 넘쳐났고, 너도나도 돈 빌려줬다. 수년 전, 저축은행 펑 터지게 하였던 PF대출이 이런 식으로 장소와 방식을 바꿔 활황을 탔다.

증권사들이 특히 재미를 많이 봤다. 수수료도 받고 돈도 빌려주고. 작년 재작년 증권사 다니던 직원들 천문학적인 성과급 많이 받았다. 동학·서학 개미들 덕도 있었겠지만, 이 단기채 시장의 팽창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데 올 초 이후 같은 이유로 움츠러든다. 안 그래도 단기채는 회사채와 달리 '기업의 신용도나 구체적 재무상태'를 잘 알고 하는 투자가 아니다.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가 부족하니 믿음도 부족하다. 다들 거래하니까, 석 달만 지나면 거래 끝나고 돈 들어오니까, 그사이에 망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돈을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 시장이다. 그러니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더 많이 움츠러든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 시장의 특징도 긴장감을 더했다. 단기채 시장은 '전문가들의 시장'이다. 개인이 아닌 기관이 대부분이다. 정보가 많다. 또 빚도 많이 내서 투자한다. (레버리지가 높다) 그래서 정보에 귀를 쫑긋하고 있다가 문제 생겼다 그러면 일순간, 단체로 돈을 뺀다. 이들이 올 초 이후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금리가 높아질수록 더 긴장하면서 '언제 터져도 터진다 긴장하자!'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증기가 자욱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방자치단체 도지사가 나타나 라이터를 당겨버렸다. 분명히 장소는 서울 여의도 금융시장, 채권시장 한복판인데 등장인물이 뜻밖이다. 게다가 뜻밖에 존재감도 거대하다. 터줏대감인 은행, 증권, 한전, 부동산 업자들은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김 지사를 바라본다.

'우리가 주인공 아니었어? 갑작스레 우리 자리를 차지한 저 정치인은 뭐지?'

영화에선 보통 이런 존재감을 가진 조연을 '씬 스틸러'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김 지사를 '씬 스틸러'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 혹시 김 지사가 주연배우인, 2022년 금융 위기의 날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 4. 때 이르게 소방수가 등장했다

김 지사가 조연에 그치고 무대를 내려가려면 별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려고 소방수가 등장했다. '경제부총리'와 '금융위원장'이다. 지난 23일, 일요일에 비상 회의를 자청해 나서면서 50조 원짜리 대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강원도가 '다는 못 갚겠다'는 취지로 난색을 보였던 금액이 2천억 원 초반대였으니, 참으로 초현실적인 금액이다.

금감원장, 한국은행장, 경제부총리, 금융위원장,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한자리에 모였다. 50조원 + 알파의 대책을 내놨다. 지난 10월 23일 일요일, 긴급히 소집된 비상경제금융회의 때.


금융시장이란 그렇다. 호미로도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고, 불도저로도 못 막고 거대한 댐을 대야 막는다. 이유를 사람들은 '신뢰'라고 부른다.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도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정부가 나서서 '내가 막아줄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What Ever It Takes, 바주카포를 동원해서라도 막아줄게' 하면서 전체 시장을 안심시킬 만큼 거대한 대책을 들고 나와야 진정된다. '내 돈은 1원 한 푼도 소중하니까'

아,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다. 한국은행이다. 초단기자금을 수조 원 댄다고 했다. 은행, 증권사 숨통을 좀 틔워주겠다고 했다. 금리를 인상하는 '경기의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경기를 자극할 수도 있는 가속페달도 함께 밟는 방식을 쓰는 셈이다.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한 번에?' 초현실적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최근 이런 일이 왕왕 있다. 감세와 경기부양 패키지를 시도하다 사달이 난 영국(사달을 낸 영국의 씬 스틸러, 리즈 트러스 총리는 책임을 지고 44일 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이나, 미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관건은 두 브레이크를 정확히 얼마나 세게, 세밀한 강약 조절해가며 밟는가다. 예술적 드라이빙이 필요하다.

■5.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채권시장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김 지사는 사달이 나자 '안 갚는다 한 적 없다, 1월에 갚는다. 그러니 더는 불필요한 혼란 없길 바란다'고 했다가 더 큰 비난받았다. 베트남에서 급거 귀국하기 직전, 12월로 갚는 날짜를 당겼다. 자세도 한층 겸손해졌다. 어쩌면 더 빨리 갚아버릴지도 모른다. 둔촌주공도 단기채 시장에서 자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정부가 뒤에서 알선했다고 알려진다)

추궁도 이어진다. 국회의원 시절에 정무위원회(금융위원회를 담당한다)도 해봤다는데, 정말 모르고 그런 것이냐?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는 정말 사전에 몰랐느냐? 당혹스런 장면이 이어진다만, 이대로 위기를 넘긴다면 '이해하기 어렵고, 초현실적'이지만 소동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김 지사는 '씬 스틸러' 급 조연 정도로 각인된 뒤 조용히 무대를 내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주연배우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감당할만한 오명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 '진태양난'이라거나 '경국지 도지사'라는 둥, '경알못' 딱지를 붙여도 좀 참아야 한다. 그리고 좀 덜 갚으려 했던 2천억 원 빚에 연체 이자가 붙어 더 불어난 상태로 돌아와도 감당해야 한다.

서영민 기자 (seo01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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