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이은 한전발 ‘회사채 대란’ 우려…“요금 현실화해야”
원가 폭등-적자 누적에 발행량 확대 불가피
정부, SMP 상한제 도입-에너지 절약 안간힘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강원도의 강원중도개발공사 기업회생 신청,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가 채권 시장을 얼어붙게 한 가운데, 한국전력(015760)(한전)의 회사채(한전채) 발행량 급증 역시 기업의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을 어렵게 만드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발전 원가 폭등에 따른 역대급 적자를 기록 중인 한전으로선 채권 발행량을 늘리는 게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이게 안 그래도 커진 채권 시장 혼란 우려를 키울 수 있어 정부도 해법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29일 양이원영 의원실과 한국예탁결제원 등에 따르면 한전은 올 들어 총 23조4900억원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지난해 연간 발행액 10조3200억원의 2.3배를 발행한 것이다. 누적 발행량 역시 53조9000억원에 이른다.
그나마 원래 계획보다 줄어든 것이다. 한전은 10월에만 열 차례 한전채 발행을 통해 3조원의 자금을 확보하려 했는데 실제 발행액은 1조7300억원에 그쳤다. 약 5000억원 규모에 이르는 세 차례의 발행 시도는 유찰, 나머지 7차례 발행에서도 31%인 7700억원은 모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채는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최상위 신용등급(AAA)으로 올 초까지만 해도 금리가 2%대 중반이었으나, 기준금리 인상에 맞춰 금리를 5.9%까지 끌어올렸으나 채권 시장의 불안 속 목표한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자금난에 빠진 한전으로선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발전사로부터 전력을 사서 이를 공급하는 공기업 한전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국제 에너지값 급등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적자를 낸 상황이다. 한전은 올 상반기에만 14조3000억원의 적자를 냈고, 연간으론 30조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통상 60조원 가량의 매출 중 절반이 적자라는 것이다.
에너지 수요가 늘어나는 겨울이 가까워지며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전력을 사들이는 기준가격(계통한계가격·SMP)은 지난달 1킬로와트시(㎾h)당 234.75원을 기록했다. 지난해(94.07원)보다 2.5배 높은 역대 최고치다. 10월 일일 SMP는 이보다 높은 250원 전후를 기록 중이다.
채권시장 불안요인 가중…마땅한 대안 없어
문제는 초우량 채권인 한전채가 안 그래도 얼어붙은 채권 시장의 자금을 쓸어갈 수 있다는 우려다. 기업의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그만큼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레고랜드 사태발 자금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50조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현 상황이 신용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금융시장의 우려는 여전하다.
한전 스스로는 채권 발행을 늘리지 않고선 현 위기를 넘길 뾰족한 수가 없다. 정부 승인이나 법 개정 없인 발전사에 줘야 할 대금을 낮출 수도, 기업·가계로부터 받는 전기료를 더 올릴 수도 없다. 정부 역시 물가 상승 부담이 안그래도 큰 상황에서 마냥 전기료를 올릴 수 없다. 정부는 이미 올 들어 4·7·10월 세 차례에 걸쳐 전기료를 약 20% 가량 올렸다. 국제 에너지값 고공 행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전의 적자를 유의미하게 줄이려면 지금껏 올린 것보다 두 배 이상 더 올려야 한다.
정부가 한전을 직접 지원할 수도 있다. 정부는 2008년 국제 에너지값이 급등하며 한전이 2조원대 적자를 내자 연료비 증가액의 약 절반 수준인 8350억원을 전기료 안정 지원을 명목으로 한전에 투입한 바 있다. 그러나 2008년의 15배에 이르는 현 적자 상황을 약간의 국비 지원만으로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 안 그래도 긴축 재정 기조인 현 정부 체제에서 수조원대 혈세를 한전에 지원하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양이원영 의원은 아예 일시적으로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입해 한전이 운영하는 송·배전망을 국유화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한전은 당장 정부의 결정과 법 개정 없인 내년 초부터 한전채 발행을 통한 운영자금 확보도 어려워진다. 한전법은 한전채 발행 한도를 한전의 자본금과 적립금의 최대 2배로 묶어놨기 때문이다. 한전이 현 적자 기조를 되돌리지 못하는 한 올해 91조8000억원이던 한전채 발행 한도는 내년 4월 이후 30조원 미만으로 대폭 줄어들 전망이다. 한전채 현 누적 발행액이 이미 한도를 초과한 만큼 추가 발행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복수의 여야 의원은 현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적립금의 5~8배까지 늘리는 한전법 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황이지만, 한전채가 채권 시장에 끼칠 영향 때문에 그 한도를 충분히 늘리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SMP 상한제 도입 추진…전문가 “요금 현실화해야”
정부는 결국 올 5월부터 추진해 온 SMP 상한제를 12월부터 한시 도입한다. 한전이 떠안고 있던 국제 에너지값 급등 부담을 공공·민간 발전사와 일부 분담하겠다는 것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올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전력시장 긴급정산상한가격 제도를 한시 도입기로 했다. 현재처럼 국제 에너지값이 급등해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전력을 사들이는 기준가격, SMP가 치솟으면, 정부가 일시적으로 발전사가 일정 가격 이상으로 팔 수 없도록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올 5월부터 SMP 상한제 도입을 추진해 왔으나, 민간 발전사의 반발로 이를 쉽사리 시행해오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국제 상황이 더 나빠지고 한전의 적자 상황이 채권 시장 불안으로까지 이어지는 만큼 한시 운용이라는 전제로 이를 강행키로 한 것이다. 산업부는 현재 구체적인 상한 가격 등을 조율 중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와 함께 에너지 효율 개선 정책에도 드라이브를 건 상황이다. 한전이 밑져가며 전력을 파는 현 상황에선 소비량을 줄일수록 한전의 적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이달 18일 공공기관의 올 겨울 실내 난방온도를 17℃로 제한했다. 하루 뒤인 19일 삼성전자(005930), 현대제철(004020) 등 30대 에너지 다소비 기업과 2027년까지 연 1%씩 에너지 소비효율을 높인다는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같은 공공·기업 참여에 이어 오는 31일엔 범국민 에너지 다이어트 서포터스 발대식을 열고 전 국민 차원의 에너지 절약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전문가와 업계는 결과적으론 현 노력과 함께 국제 에너지값 급등 상황을 소비자 요금에 반영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러-우크라 전쟁 여파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국제 에너지값 영향이 적은 원자력이나 신·재생에너지 발전 이용률을 단기간 내 끌어올릴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근본 해법인 에너지 절약과 효율 개선을 위해서도 요금 신호가 정상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이 의원은 “가격 신호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전력시장이 정상화하고 에너지 소비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욱 (ne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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