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무섭고 서러웠을 것"…황망한 죽음, 판사의 이례적 위로

이비슬 기자 2022. 10.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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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지키고 싶다" 이별 통보하자 스토킹 …출근길에 흉기 휘둘러
法, 7장 분량 이례적 양형사유…징역 30년 선고 '항소'
ⓒ News1 DB

(서울=뉴스1) 이비슬 기자 = "불행히도,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가정폭력이나 스토킹 범죄로 고통받고 있다. 그들 중 불운한 누군가는 한때의 연인, 지인이었다가 섬뜩한 살인자로 돌변한 얼굴을 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눈에 담은 채 황망히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기도 한다. 이 사건 살인 범행의 피해자에게 그러한 불운이 닥쳤다."

지난 13일 대구지법 안동지원 형사합의부(부장판사 이민형)는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동시청 소속 공무원 A씨(43)에게 징역 30년형을 선고하며 이례적인 문장들로 형벌 결정 사유를 서술했다.

판결문에는 직장 동료이자 내연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에게 중형을 내리기까지 판사가 마주했던 치열한 고민과 피해자를 향한 위로가 편지처럼 빼곡하게 담겼다.

'오랫동안 피해자를 서서히 조여들던 서늘한 불안감, 미리 흉기를 준비해 피해자의 근무지에서 기다린 치밀함, 아침 출근길에 방심한 틈을 노려 피해자를 습격하고 수십 번 흉기를 휘두른 잔혹함, 관공서 주차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변, 피해자가 겪었을 처절한 고통과 유족들이 겪은 참담한 충격, 엄마 잃은 자녀들이 자라면서 감수해야 할 비참한 설움'은 재판부가 요약한 사건의 핵심이다.

통상 범행 동기와 정황, 피고인 전과나 반성 여부 정도를 언급하며 마무리 짓는 판결문들과 달리 7장에 걸친 양형 사유는 "무서웠을 것", "서러웠을 것"이라는 표현들로 피해자 편에 섰다. 판사의 소명감을 무겁게 짓누른 이 사건은 올해 여름 안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News1 DB

폭염이 이어지던 7월5일 아침. A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를 품에 안고 안동시청 주차타워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아침 일찍 피해자 B씨(50·여) 집 앞까지 갔지만 B씨를 만나지 못하자 시청으로 곧장 차를 몰아 도착한 직후였다.

B씨가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A씨는 "할 말이 있다"며 "차에 타라"고 B씨를 위협했다. B씨는 완강히 거부했다. 겁을 먹고 소리치며 도망가는 B씨를 향해 A씨는 무참히 흉기를 휘둘렀다. B씨가 피를 흘리며 발버둥 치는 동안에도 잔혹한 범행은 계속됐다. 출근길에 현장을 목격한 동료들조차 도저히 손쓸 틈이 없었다.

둘은 3년 전인 2019년부터 안동시청에서 함께 근무하며 알고 지냈다. 내연관계로 발전한 뒤부터는 2달가량 교제했다. B씨가 "가정을 지키고 싶다"며 이별을 통보하자 스토킹이 시작됐다.

범행 1년 전부터 A씨는 '아직 잊지 못했다', '내 가정이 파탄 났다. 아내와 정리를 할 테니 나랑 함께 살면 안 되겠느냐'는 메시지를 보내며 B씨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B씨 시부모에게 내연 관계를 폭로하고 B씨 남편을 찾아가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무렵 A씨 가족관계도 망가졌다. B씨를 향한 집착이 이어지던 지난해 12월 A씨는 부부싸움을 하다 아내 승용차에 돌을 던지고 발길질해 자녀와 가족에게 접근이 금지됐다. 도박에도 손을 댔다. 아내와 처제에게 빌린 돈도 6억원에 달했다. A씨는 자기 처지를 비관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B씨인 것만 같은 망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범행 나흘 전 A씨는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너에게 상처와 배신감을 줬던 때가 그X 만났을 때지? 내가 정리해줄게. 그X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됐고 공허함에 도박에 다시 손을 댔다. 그런데 그X은 잘먹고 잘산다. 데리고 같이 간다. 내가 반드시 죽인다. 그 뒷일은 네가 겪어봐라.'

나흘 뒤 출근길 A씨가 휘두른 흉기에 다친 B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저혈량 쇼크로 결국 숨을 거뒀다. A씨는 범행 직후 안동경찰서에 자수했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1심에서 징역 30년형과 15년간 위치추적 장치 부착을 명령받았다.

ⓒ News1 DB

재판부는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평생 마주치지 않길 간절히 바랐던 피고인의 살기 가득한 얼굴이었다"며 "아마도 피해자는 생전 처음 겪는 통증에 아주 아팠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피를 보며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남편에게는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엄마 품을 그리워할 어린 두 자녀를 떠올리며 많이 서러웠을 것이다. 피해자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2022년 7월 5일 아침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됐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판결문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많은 시민이 사법부에 묻는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 한 명 죽인 범죄로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책임과 형벌의 비례관계를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이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날아들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유하는 확고한 신념은 사람의 생명이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에서 수호하는 최고의 법익이자 모든 인권의 전제가 되는 가장 존엄한 가치라는 사실이다.

본 재판부는 피고인 선고형 결정에 사형 및 무기징역형까지 포함한 법정형 범위 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과 원통함에 합당한 처벌, 피해자의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 생긴 균열된 정의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노력,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유사 범죄로 일상을 위협받으며 사회적 안전 시스템 구축과 범죄자 엄벌을 외치는 많은 잠재적 피해자들의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하며 형량을 정했다."

최후변론으로 "죗값을 달게 받겠다. 깊이 반성한다"고 호소한 A씨는 1심 선고 나흘 뒤 항소했다.

b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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