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중국이 온다…시진핑 3기, 체제경쟁·국제질서 재편 시도
3연임 시진핑의 ‘새로운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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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가 막을 내렸다. 곧바로 하루 뒤 향후 5년을 통치할 지도부인 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이하 20기 1중전회)를 열고 ‘새로운 중국’의 시작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른바 ‘중화민족 부흥’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마오쩌둥의 혁명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구호로 대체했듯이, 이제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흥’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난 30여년간의 세계의 공장과 시장이 아닌 새로운 중국, 어떤 모습일까?
철저히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중국 체제는 변화보다 지속에 방점이 있다. 이번 당대회를 통해서도 이 특징이 확인되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중국 특유의 제법(提法), 즉 네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당대회 전후로 화두가 된 것은 ‘중국식 현대화’와 ‘집중통일영도체제’이다. 중화민족의 부흥은 목표이고, 중국식 현대화는 내용이며, 집중통일영도체제는 이 내용을 실현할 전술 배치(포메이션)다.
본격 체제경쟁에 나설 것 천명
이번 당대회 보고에서 시진핑은 2021년 중진국 수준을 의미하는 ‘전면적 샤오캉’(小康·모두가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의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밝힌 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2035년과 2049년에 각각 사회주의 현대화 기본과 전면 달성을 통해 중화민족의 부흥을 목표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개혁·개방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이다. 대신 중화민족 부흥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정치 기획인 ‘중국의 꿈’ 서사에서 두번째 단계인 민족의 부흥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두 개의 다른 시대를 지도하게 되었다. 물론 개혁·개방 시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의 꿈인 민족의 ‘부흥’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부흥은 예전의 영광과 쇠퇴를 전제로 한다. 중화제국의 영광 그리고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쇠퇴가 그것이다. 중국은 이제 예전의 영광, 즉 초강대국으로 다시 일어서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도광양회가 끝났다.
그렇다면 ‘중화민족 부흥’의 내용은 무엇인가? 시진핑은 당대회 보고에서 중국식 현대화라고 공식 천명했다. 사실 이 개념의 구체적 내용은 시진핑의 이전 집권기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구 대국의 발전 △공동부유 △정신과 물질문명의 조화 △평화발전 등이 주된 것들이다. 문제는 이름이다. 이전 시기에 ‘사회주의 현대화’라고 부르던 것을 이제는 ‘중국식 현대화’로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화는 일반적인 의미의 선진(국)화 내지 발전과 유사하다. 이 개념의 이전 버전은 2010년께부터 공식화된 ‘중국특색 사회주의’다. 다른 국가의 실패한 사회주의와 중국의 그것은 다르고, 중국식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있으니 인정해달라는 요구로 해석됐다. 상당히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요청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중국에 대해 미국은 함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왔다. 이 때문에 미-중 갈등 등이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중국식 현대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공세적이고 적극적이다. 현대화에는 서구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식도 있으니 여러 다른 나라들은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이 개념의 공식화 이후 중국 관영 언론에서는 중국식 현대화는 경제 발전을 촉진하면서도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기를 희망하는 국가에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보충 설명하기도 했다. 또 서구식 현대화는 경제적 양극화, 제국주의적 착취, 군사적 침략, 환경 파괴 등의 폐해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즉 중국은 이제, 내 길을 가겠다는 것을 넘어 내 길이 옳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특히 미-중 간의 전략적 경쟁이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 중국식 현대화 추진 선언은 국제적 차원에서 본격 체제경쟁에 나설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대회 보고에서는 미국을 겨냥한 듯 “패권주의, 일방주의, 보호주의, 진영화, 디커플링, 독단적 제재” 등을 열거하며 현 국제질서의 문제점을 나열한 것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이 낌새를 이미 알아차렸던지, 당대회 직전인 10월12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국제질서를 바꿀 의도와 실행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경쟁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집중통일영도체제의 완성
집중통일영도라는 개념도 이번 당대회를 전후하여 많이 회자되었다. 이는 덩샤오핑에 의해 설계된 개혁·개방기 포메이션인 집단영도의 대체물이다. 집단영도체제는 마오쩌둥의 혁명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실현할 포메이션이었다.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축소하고, 상호 경쟁과 협력을 강제한 체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장쩌민, 후진타오 등 이 시기의 최고지도자들은 다른 지도자들과 지위는 동등하되 권한과 책임이 다른 이(first among equals)들이었다. 공산당의 최고 통치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항상 홀수로 구성하여 주요 정책 결정 시 투표에 대비했다. 이 상황에서 최고지도자 역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집중통일영도체제에서 최고지도자는 지위에서부터 다른 지도자들과 다르다.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모든 정책 결정이 이뤄진다. 따라서 최고지도자의 권력 강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렇게 포메이션을 바꾸게 된 이유는 목표와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이 동굴 속에서 내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던 시절은 끝났다. 다시 동굴에서 나와 천하를 제패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사불란한 지휘와 기민한 행동이 보장되는 집중통일영도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당대회에 대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평가가 납득이 된다. 이변은 없었고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대회 보고에서 시진핑에 의해 이미 향후 공산당의 목표와 내용이 공식화되었다. 다만 집중통일영도체제, 즉 차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체화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인위적인 연출 여부에 대한 진위와 상관없이, 당대회 폐막식 도중에 강제퇴장 당하는 듯한 모습의 직전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를 통해 많은 이들이 변화의 폭과 깊이를 예감했을 수 있다. 이어진 20기 1중전회 직후 전세계 외신 기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면면으로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인 중국 정계 서열 1~7위까지 모두 시진핑 계열의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로써 시진핑이 이끌고 다른 지도자들은 그를 보좌하는 집중통일영도체제가 완성되었다. 공식적으로 시진핑과 그의 핵심 관계자들, 즉 ‘시핵관’으로 중국의 최고지도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최약체 지도자에서 장기집권까지
이것은 시진핑과 그 측근들이 10여년간 철저히 준비한 결과이다. 2007년 중국 공산당 당내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선전되었던 민주추천제도, 즉 제한적인 범위이기는 하지만 투표로 차기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방식에 의해 시진핑은 ‘의외로’ 차기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8대 원로 중 한명인 시중쉰의 아들이라는 점 빼고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이력도, 특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도 없었다. 당시 집권 파벌이던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 파벌에 대한 견제 심리와 2대 파벌인 전 최고지도자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방의 지원에 의해 어렵사리 최다 득표를 얻었다. 따라서 2012년 시진핑이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됐었던 당시, 아무도 현재의 장기집권을 예상하지 못했다. 역대 최고지도자 중 최약체로 꼽히던 그가 어떻게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랐을까?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주효했던 것은 ‘반부패 드라이브’의 성공이다. 성공의 배경으론 그가 1978년 이후 개혁·개방기 형성된 중국 정치의 주요 파벌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건국 이후 중국은 공산당과 정부가 동일시되는 당-국가 체제로 인한 부패 문제가 고질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중국 정계에서 주요한 파벌 투쟁 역시 이 부패를 매개로 진행되었으나, 서로가 기득권이기에 전면전으로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반부패 드라이브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를 통해 한편으론 당 간부들의 기강 확립과 체제 순응 효과를 얻었고, 다른 한편으로 양대 파벌이었던 상하이방과 공산주의청년단의 주요 인사들을 낙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최대 정치 파벌인 상하이방과 공산주의청년단은 이미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사실상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상대적으로 고령인 상하이방 주요 인사들은 이미 시진핑 집권 1기에 대부분 낙마했다. 직전 집권 파벌인 공산주의청년단 인사들도 반부패의 화살을 피하지 못해 상당수 낙마했다. 특히 이번에 일부 언론에서 이 파벌의 유력 인사로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을 예측했던 후춘화 현 국무원 부총리도 이미 2017년에 부패 사건으로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에서 해임된 바 있어서 정치 경력에 흠이 난 상태였다. 이렇게 무주공산이 된 상황은 중국 공산당과 정부 간부들이 앞을 다투어 시진핑에게 충성 경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또 정치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인들의 역사적 트라우마 해결에 대해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다. 사실 개혁·개방기 중국은 ‘묻지마 성장’이 구호이자 목표였다. 시진핑은 묻지마 성장의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성장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 현실화된 시기에 집권했다. 자칫하면 집단적인 ‘현타’가 올 수도 있는 시점이었다. 경제 규모 세계 2위의 물질적 성장을 이룩한 중국, 이제 어디로 가야 되나, 많은 사람들이 혼란해하던 차에 시진핑은 물질보다는 중국인들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것이 이른바 ‘중국의 꿈’이다. 이 서사는 중국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구조는 단순하다. ‘예전의 우리는 강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해졌고, 그동안 노력해 이제 거의 예전 수준을 회복했다. 좀 더 노력해서 예전의 강대함을 되찾자.’ 한마디로 강대한 중국의 몰락을 알린 19세기 치욕의 아편전쟁 이후 200년에는 다시 예전의 중국의 명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 서사는 대중뿐만 아니라 엘리트층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했고, 점차 국정 운영의 논리와 철학이 되었다. 그 이후 목표 지향적인 중국적 사고틀에 따라, 이 중국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체제와 이념 그리고 노선이 따라가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 새 대응 전략 마련해야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정책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시진핑 권력 강화에 일정하게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2010년께부터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진행 중인 중국에 대한 견제 정책은 위기 상황을 조장하면서 반대의 목소리를 통제하기에 매우 유용한 근거로 작용했다는 의미이다.
이념이나 가치보다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며, 권위주의적 경향을 정당화하면서 통제를 강화할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자민족 부흥의 의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질서 재편을 시도하는 중국. 우리가 앞으로 상대할 ‘새로운’ 중국이다. 당분간 상당히 어색할 것이다.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이라면 새로운 대응 전략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할 때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의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의 글귀가 떠오른다.
주장환 한신대 중국학과 교수·한신대 유라시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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