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이 가을 채워줄 에스프레소 바람

홀연히 사라진 그 남자의 정체는
겹겹이 쌓여있는 빈 데미타세(에스프레소 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내린 진한 커피의 흔적. 소셜미디어에서 봤던 바로 그 장면이다. 서너 사람의 흔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커피잔을 움켜쥔 이는 단 한 명,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남은 한 모금을 짧게 음미하고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통속적 문구가 새삼 생경하게 느껴졌다. 지난 20일, 서울 약수동의 에스프레소 바 ‘리사르 커피’에서 마주한 ‘흔한’ 풍경이다.
최근 국내 커피 업계의 이슈를 꼽자면 단연 ‘에스프레소 바 열풍’이다. 서울 강남을 비롯해 연남동, 성수동 등 일명 ‘핫플’에는 어김없이 에스프레소 바가 자리하고 있다. 업계 추정 지난 1년간 국내에 문을 연 에스프레소 바는 대략 100여개에 이른다.
여러 곳에 분점을 낼 정도로 성업 중인 매장도 다수다. ‘리사르 커피’는 올 초 명동과 청담동에 2·3호점을 열었다.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일산의 ‘올댓커피’는 여의도 더현대서울에 매장을 차렸고, ‘오우야’는 합정, 해방촌, 종로, 마곡 등으로 점포를 확장하며 브랜드를 프랜차이즈화했다.
대기업들도 적극 유행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더본코리아의 빽다방은 MZ세대를 겨냥한 신메뉴 ‘에스프레소 꼼프레또’를 출시했고, 파스쿠찌는 본사 인근에 에스프레소 바 콘셉트 매장을 운영 중이다. 편의점 GS25는 자체 원두커피 브랜드 ‘카페 25’의 에스프레소 메뉴를 추가하고 동시에 적은 용량에 최적화된 에스프레소 잔을 선보였다.
온라인에서의 인기 또한 뜨겁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에스프레소 바’를 검색하면 10만여개의 게시물이 뜬다. 생활관측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소셜 빅데이터상에서 언급된 ‘에스프레소 바’는 34만4000건으로 2021년 1분기와 비교해 8배 이상 증가했다.

에스프레소, 들어는 봤는데…
에스프레소(Espresso),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다. 국내에서는 에스프레소에 일정량의 물을 더한 미국식 커피, 아메리카노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는 19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에스프레소’ 하면 ‘쓰다’, ‘진하다’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빠르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커피 전문가들은 “약 6~7g의 분쇄 원두를 20~30초의 짧은 시간에 85~95도 사이의 뜨거운 물과 7~9바(bar)의 높은 압력으로 추출한 진한 이탈리아식 커피”라고 정의한다. 주로 모카포트라고 불리는 1인용 추출기구 또는 전용 기계를 이용해 추출하는데, 물을 투과시켜 우려내는 방식이 아닌 강한 압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추출하는 점에서 드립 커피와 구분된다.
이렇게 뽑아낸 커피의 양은 대략 30㎖ 정도다. 에스프레소의 표면에는 ‘크레마’라고 하는 적갈색의 크림 층이 생기는데, 이는 커피의 오일 성분으로 다양한 향미를 담고 있다. 커피전문가 이승훈씨는 저서 <올어바웃 에스프레소>에서 “에스프레소는 진한 향미로 마치 초콜릿 향을 머금은 듯한 느낌을 준다”며 “또한 카페인 함량이 적어 가장 맛있으면서도 몸에 좋은 성분을 지닌 커피 엑기스”라고 극찬했다.
에스프레소는 추출 양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흔히 알고 있는 에스프레소는 1잔은 ‘솔로’다. 에스프레소 2잔은 ‘도피오’, 정량보다 적은 15~20㎖를 뽑아낸 커피는 ‘리스트레토’라 불린다. 에스프레소를 35~40초 동안 연하게 추출하면 ‘룽고’가 된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 물과 만나 끝맛이 씁쓸한 아메리카노와 흡사한 맛이 난다.
취향에 따라 첨가물로 색다른 맛을 누릴 수도 있다. ‘콘파냐’는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생크림을 넣어 부드럽게 마시는 커피다. 기호에 따라 우유를 더하거나 설탕, 시럽 등을 추가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에스프레소에 레몬 1조각을 넣은 ‘로마노’, 에스프레소에 크림과 카카오 토핑을 얹은 ‘피에노’, 리스트레토에 탄산수와 레몬청 등을 더한 ‘마자그랑’ 등이 에스프레소 바에서 만나볼 수 있는 대표 메뉴다.

포개진 커피잔이 의미하는 것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부단히 존재감을 드러냈음에도 메뉴판 한 줄에 그쳤던 ‘아싸’ 메뉴가 단기간에 ‘인싸’ 메뉴로 떠오른 배경은 무엇일까.
합리적인 가격과 차별화된 맛이다. ‘카페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후죽순 쏟아지는 커피 브랜드와 익숙한 맛에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 서서 마시는 커피와 에스프레소의 쌉쌀하고도 찐한 맛, 착한 가격은 매력으로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리사르 커피’는 ‘국내 1호 스탠딩 에스프레소 바’로 불린다.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판매되는 금액인 1유로에 착안해 1500원으로 에스프레소 가격을 책정했다. 동시에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어 먹는 레시피를 널리 알렸다. ‘달달한’ 커피 맛은 동네 어르신들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역설적인 모습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 전국 에스프레소 바 유행의 기폭제가 됐다.
애초 매장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저렴한 가격과 다채로운 메뉴를 맛본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너 잔의 커피를 동시에 주문했고, 이는 개성과 재미를 추구하는 MZ세대의 ‘인증’ 문화와 만나 하나의 놀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들은 새로운 에스프레소 바를 찾아 커피를 마시고 빈 잔을 쌓아 올린 다음 이를 촬영해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게재하는 식으로 신문물을 누린다. 주문부터 수령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짧고 굵게’ 커피를 즐기는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상 깊숙이 침투한 ‘거리 두기’ 상황이 에스프레소 바를 급속도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라 보는 이도 있다. 바리스타 최고중씨는 “이른바 ‘혼공족’이나 일행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카페를 찾는 이들이 거의 없어 고객 회전 속도도 무척 빠른 편”이라며 “평균 체류 시간이 길지 않다 보니 코로나 시국에 최적화된 카페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고 전했다. 직장인 김주영씨 역시 “점심 식사 후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하며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재택근무가 그리울 때가 있다”며 “기성 커피숍에 가면 동료들과 불필요한 대화를 나눠야 해 부담감이 컸는데 에스프레소 바는 이런 불편함을 해결해준 공간”이라고 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해외여행이 제한된 상황에서 에스프레소 바는 이국적인 유럽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대체 장소가 되기도 했다. ‘명동성당 뷰’로 잘 알려진 명동의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바 ‘몰또’에서 만난 주부 한혜정씨는 “이탈리아 소도시로 떠났던 신혼여행과 그곳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가 그리울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며 추억을 곱씹었다.

에스프레소 바에 없는 세 가지
물론 ‘스피디한’ 공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에스프레소 바 ‘구테로이테’는 ‘커피 오마카세’를 지향한다. 자체적으로 만든 코스 메뉴를 통해 합리적인 가격대로 다양한 커피를 즐길 수 있게 했다. 계절별로 다른 구성을 제공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또 있다. 대다수의 에스프레소 바에는 의자가 없다. 좌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5석을 넘지 않고 그조차도 추가 요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 두세 모금이면 끝나는 에스프레소의 특성과 저렴한 커피 가격을 보완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다. 종로구에 위치한 에스프레소 바 ‘쏘리’는 이런 단점을 유쾌하게 풀었다. 이사라 대표는 “의자가 없어서 ‘쏘리’, 아메리카노가 없어서 ‘쏘리’ ”라며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익숙한 문화가 아니다 보니 고객들이 느낄 불편함을 재치 있게 풀어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장 이용에 나이 제한도 없다.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아도 좋다는 말이다. 로마 3대 커피숍 중 하나인 ‘타짜도르’ 동탄점의 김솔 매니저는 “의외로 40~50대 단골이 많다”며 “이들은 서너 개의 다른 메뉴를 주문해 각각의 맛을 비교하며 음미하는 것을 즐긴다”고 귀띔했다.
규칙 또한 없다. <스페셜티커피,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수까지>의 저자인 심재범 커피 칼럼니스트는 “한국의 에스프레소 바는 정통의 시각에서 봤을 때 진화하는 변주곡이다. 그 어떤 룰도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다만 현재 유행 중인 잔을 쌓는 문화가 마치 에스프레소 바의 불문율처럼 강조되는 경우가 있어 조심스럽다”고 언급했다. 리사르 커피의 이민섭 대표 역시 “이탈리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에스프레소 바’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에스프레소 잔에 설탕을 타서 제공하는 것 또한 정석은 아니다. 낯선 에스프레소 바를 보다 친근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문구와 방법일 뿐”이라며 “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즐기고 나만의 방식을 커피를 마시고 음미하기를 바란다”고 제안했다.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노동을 위한 각성제’를 넘어 맛과 멋을 겸비한 일상의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업계는 커피 시장의 에스프레소 바 열풍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조소진 바리스타는 “국내 커피 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했기 때문에 에스프레소 바가 인기를 끌 수 있었다고 본다”며 “선입견으로 가득했던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니 의외로 괜찮고, 그 만족감이 소비로 이어져 진입장벽을 낮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찬바람이 분다. 이번 주말엔 가볍게 에스프레소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나만의 스타일로.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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