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인사’ 대신 ‘구찌 클러치’ 든 하객… 조폭이 달라졌어요
비상 걸린 연회장 가보니
지난 23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의 한 특급 호텔. 오전부터 호텔 주변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오후 5시에 부산 최대 조직인 ‘칠성파’의 전 두목 팔순 잔치가 예정돼 있기 때문. 전국 조폭들이 부산진구로 몰려들 것이라는 온라인 예고 기사에 “이번 주말엔 부산에 가면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날 오후 1시, 같은 호텔, 같은 연회장에서 부산에 지역구를 둔 검사 출신 중진 국회의원 딸의 결혼식이 열렸다. 3층 연회장 복도엔 식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화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통령 화환부터 각 부처 장관은 물론, 여야 따로 없는 국회의원 휘장이 빽빽이 들어찼다. 하객 수백 명이 혼주에게 인사하려고 길게 줄 선 것도 진풍경. 500여 좌석이 순식간에 찼다.
오후 3시쯤 결혼식 하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검정 등 무채색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삼삼오오 나타나기 시작했다. 5시에 시작하는 칠성파 이모(80)씨의 팔순 잔치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조직원들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이들은 앞서 열린 결혼식 화환들을 보며 사진을 연방 찍기도 했다. “죽이네, 대통령 화환을 내 언제 보겠노?”
신부 대기실에 앉은 두목
오후 4시가 되자 고급 외제차들이 호텔 정문에 연달아 멈춰 섰다. 호텔 주변엔 경찰차 3대가 배치됐고, 행사장 복도엔 경찰로 보이는 이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곳곳에 진을 치고 경계에 임했다.
마침내 팔순 잔치의 주인공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형님’이 아니라 ‘회장님’으로 인사를 받으며 등장한 그는 백발에 작고 마른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빛과 이력만은 범상치 않았다. 칠성파 전 두목인 그는 폭력, 범죄 단체 조직, 금품 갈취와 조세 포탈 등 범죄 혐의로 10여년 옥살이를 치렀다. 칠성파는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속한 조직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조직원 규모가 100명 정도지만, 이씨가 칠성파를 이끌던 전성기에는 조직원들 세력이 500여 명에 달해 부산 지역은 물론 전국 조폭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씨는 조금 전만 해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있던 대기실에 들어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형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들이 찰칵대며 사진을 찍어대자 조직원 몇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마, 그만 쫌 하이소! 손님들 있는데 뭐 하는 짓입니꺼!” 하며 제지했다.
조폭의 필수템은 명품 클러치?
운 좋게 들어간 연회장엔 뷔페가 차려져 있었다. 회와 초밥, 갈비와 그릴 새우, 잔치국수가 보였다. 하객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저마다 손에 명품 클러치를 들었다. 보테가베네타, 루이비통, 구찌 등 브랜드도 다양했다. 여러 개 휴대폰을 소지하기에 좋아 보였다. 간혹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걸쳐 드라마 ‘야인시대’를 연상시키는 하객도 눈에 띄었다.
한때는 세 확장을 위해 칼부림도 마다하지 않는 사이였지만, 잔치엔 다른 조직의 수장급들도 발걸음을 했다. 1970년대 서울 명동을 장악했던 ‘신상사파’ 두목 신모(90)씨는 거동이 불편한데도 부산을 찾았다. 사회를 맡은 유명 개그맨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회장님이 계신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란다”고 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원로들의 화환도 즐비했다. 충북 청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파라다이스파’의 전 수장 신모씨 화환,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신우회 일동’ 화환, 광주를 거점으로 성장해 서울을 한때 장악한 ‘양은이파’의 전 수장 조모씨 화환도 눈에 띄었다. 이날 경찰 추산 250~300명이 행사에 참석했다.
주인공인 ‘이 회장’은 트로트 가수들과도 인연이 깊은 듯했다. 트로트계 전설인 남진의 화환이 놓여 있었고, 행사장엔 초대받은 트로트 가수들을 위한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사회자는 “이 회장께서 문화 예술을 사랑해 연예인들을 많이 도와주셨다”고 소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부와 신랑이 행진했던 ‘버진 로드’는 트로트 가수들이 축가를 부르는 무대로 바뀌었다. 대부분 부산에서 활동하는 가수라고 했다.
깍두기 인사? “그건 아이 된다!”
1주일 전 칠성파 전 두목의 팔순 잔치 첩보를 입수한 부산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행사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 사태에 대비해 두 차례 대책 회의를 열고, 사전 경고 조치, 현장 대책 방안을 논의했다. 무엇보다 수십 년째 ‘피의 대결’을 벌여온 ‘신20세기파’와 충돌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부산경찰청과 관할경찰서는 물론, 타 청에서도 지원자를 받아 현장 대응팀을 꾸렸다. 이날 현장에 50여 명을 투입한 경찰은, 여럿이 도열해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등, 시민들에게 ‘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행위를 자제하라는 내용을 주최 측에 미리 전달했다.
다행히 이날 잔치는 어떤 충돌도 없이 끝났다. 경찰의 경고를 몰랐던 몇몇 조직원이 “형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꺼!”를 외치며 90도로 ‘깍두기 인사’를 하자 놀란 형님이 “이런 거 하면 아이 된다 안 했나” 하며 핀잔을 주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뿐이다. 사회자 역시 본격 식순에 앞서 “우리 회장님은 이 예식을 최대한 간소하게, 검소하게 해서 이웃 주민에게 불편이 없도록 배려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라고 강조했다.
회장님으로 등극한 조폭 두목
시대와 함께 조폭 문화도 변하는 걸까. 범죄 단체를 수사한 경험이 있는 수사기관 관계자는 “영화에서 나오듯 만나면 무조건 칼부림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오히려 이권 사업에 따라서 느슨하게 뭉치기도 하는 게 요즘 조폭”이라고 했다. 또 다른 형사는 “요즘 조폭은 주로 부동산 PF나 시행사 등 사업가로 변신해 이권 사업에 개입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조직 범죄에 연루될 경우 형사사건으로 입건되는 게 아니라 경제사범으로 입건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형님, 오야붕, 두목 같은 호칭이 죄다 ‘회장님’으로 바뀐 것이 그 단면. 이날 팔순 잔치에도 ‘이ΟΟ 회장 산수연’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미수연, 구수연(구순연), 만수연, 천수연, 기대하면서 아쉬운 무대를 접도록 하겠습니다!” 가수들 열창이 끝나자 당초 예정 시각보다 1시간 빨리 모든 식순이 마무리됐다. 휠체어를 탄 회장은 조용히 행사장을 빠져나갔고, 조직원들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님” “다음에 또 뵈입시더!”라고 인사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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