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계 재일코리안 가족의 아픈 역사
영화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 풀어
부모에 대한 기억·북한의 가족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회고 형식
한국서 기획해 국내서 처음 공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양영희/인예니 옮김/마음산책/1만4500원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분단됐지만, ‘재일코리안’ 사회는 거리 구석구석까지 구불구불 38도선이 얽혀 있던 1964년. 영화감독 양영희는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던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났다. ‘재일코리안’의 7할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던 시절이다. 훗날 자신의 가족을 주제로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양 감독 부친 역시 조총련 활동가였다. 양 감독의 세 오빠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간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역시 열렬한 조총련계였던 어머니조차 어느 날 북에서 날아온 초췌한 몰골의 아들 사진을 보고 결국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직접 방문한 북한에서 참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북에 있는 자식들 삶을 조금이라도 보살피기 위한 양 감독 어머니의 북한행 소포 보내기는 결심에서 신념으로, 그리고 심지어 욕조까지 소포로 보내는 집념으로 나아갔다.
“오빠들을 돌려줘”라는 말을 곱씹으며 울어야 했던 양 감독 역시 그 고통과 상실감을 원동력 삼아 가족 이야기를 캠코더에 담기 시작했다.
오랜 작업 끝에 ‘디어 평양’을 공개하자 조총련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양 감독에게 사과문을 강요한다. 이를 거부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한다. 이로써 북의 가족을 아직까지 못 만나고 있는 양 감독은 4년 후 사과문 대신 ‘굿바이, 평양’을 발표했다. 감독은 작가의 말에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라고 썼다.
일생을 북한 정권에 충성하며 세 아들까지 북으로 보낸 아버지가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은 건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병상에서 아버지는 양 감독에게 “영희가 정한 길, 쭈욱 가면 돼”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분단 때문에 양 감독과 가족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은 장면마다 생생히 전달된다. 그가 가족 이야기를 이처럼 끊임없이 퍼 올리는 이유가 공감된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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