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파수꾼이여, 지금의 밤은 무슨 색입니까

2022. 10. 2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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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이러스 팬데믹과 함께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더 커진 불안 속에서 저 연옥의 시간을 통과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 막후에서 격리, 감시, 고발 따위로 작동하던 치안 권력의 과잉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우리가 보듬고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과 안전, 일상의 작은 기쁨과 보람, 생업과 우정과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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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치안권력의 과잉 드러내
좋은 삶으로의 회복력 되찾아야

우리는 아직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염자는 줄고 엄격하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느슨해졌다. 확진자를 강제 격리하고 감염 경로가 불확실한 확진자의 동선을 범죄 행각 뒤지듯 하던 광기 어린 소동은 거의 사라졌다. 모든 입출국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제 검사와 같은 치안 장치 역시 상당 부분 거두어졌다. 그 결과 흩뿌려지는 바이러스 전염병에서 초래된 대중보건 공포와 광란 사태는 가라앉는 추세다. 하지만 이 전염병은 진화되지 않은 채로 우리 사회는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코로나19에서 촉발된 사회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사회를 덮친 집단 패닉이 지나간 뒤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공중 안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배제하는 예외 상태를 상시화하지는 않았던가? 치안 권력과 결탁한 의학 권력의 선전과 선동의 위력에 우리는 필요 이상의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아닐까? 무지하고 덜 섬세한 정부 정책의 오류에 항의나 제동을 걸지 못한 채 순응한 결과로 우리는 정말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우리의 삶이 안전한 기반 위에서 번성하던 과거 평화스러운 노멀 상태로의 회귀는 가능할까?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온 퇴영적인 몸짓, 즉 뒷걸음으로 미래에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장석주 시인
바이러스 감염자는 그저 운이 나빠 환자로 지명되었을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무증상 환자다. 환자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환자는 죄책감을 짊어져야만 했다. 과도한 치안 정치를 펼친 정부의 평범한 일상을 정지시키는 봉쇄와 격리 조치에 고분고분 따르는 가운데 범죄자가 제 얼굴을 가리듯 우리는 ‘얼굴 없는 인간’ 노릇을 해야만 했다. 또한 의학 권력이 쏟아내는 각종 의견과 처방에 따랐는데, 돌이켜보니 그게 능사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르조 아감벤이 했듯이 이렇게 물었어야 마땅하다. “파수꾼이여, 지금의 밤은 무슨 색입니까?”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두려움은 강요된 두려움이었다는 게 분명해졌다. 우리는 그 두려움 속에 함부로 방치되고 벌거벗은 생명 취급을 받았다. 지금 따지고 분별할 것은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전염병과 관련한 치안 권력의 과도한 명령과 조처, 즉 ‘항시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세요’ ‘집에 머물고 대중이 모이는 곳에 가지 마세요’ ‘이동을 자제하세요’ 하는 따위의, 신체 이동의 자유를 간섭하고 일상의 사소한 기쁨의 기회를 제한하던 그 방식의 절차와 정당성에 대해서다.

우리는 바이러스 팬데믹과 함께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더 커진 불안 속에서 저 연옥의 시간을 통과해 왔다. 감금과 격리가 강제되는 새로운 전체주의의 연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이곳에 도착한 것은 잘한 일이다. 팬데믹이 수그러들자 모호하던 것이 뚜렷한 형체와 윤곽을 드러낸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 막후에서 격리, 감시, 고발 따위로 작동하던 치안 권력의 과잉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미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조르조 아감벤의 예언은 불길하다. “몇 년 내 인류는 레밍과 비슷해질 것이다. 인류는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저항할 권리’)

우리가 보듬고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과 안전, 일상의 작은 기쁨과 보람, 생업과 우정과 사랑일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상실한 예전 그 좋은 삶으로의 회복력을 되찾아야 할 때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시 정지되었던 의식, 놀이, 축제는 다시 계속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우리 자리를 내어주고, 삶은 은총을 나누자. 노동은 희망의 몸짓이 되고,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얻은 나날의 안녕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안의 원소를 남김없이 불태우며 사는 동안 삶의 의미화에 이를 수 있다. 시인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노래했듯이 우리는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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