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평전 단풍이 들 때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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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가을 풍경이 도착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옛날 남부군 여성 동지였던 이와 수표교 근처에서 스쳤던 일을 풀어내고 싶어요. 지리산 백무골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30년 만에 만났지만, 따라붙는 시선이 무서워 눈으로만 안부를 물은 채 엇갈렸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리산 세석평전의 가을을 보여주고 싶다고도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지리산 근처에 갔으나 세석평전에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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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가을 풍경이 도착했다. 지인이 세석교 위에서 찍어 보낸 빨갛고 노란 단풍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25년 동안 마음으로만 품고 못 가본 이곳에 다시 가을이 왔구나.
1996년 1월 말, 출판사에 갓 입사한 나는 서툰 실력으로 계간지 봄호를 마무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시차를 두고 날아드는 원고들 정리하랴, 작가 인터뷰하랴 한겨울에도 진땀을 흘려대는 내 책상에 두툼한 봉투가 날아들었다. '속히 검토해보고 나쁘지 않으면 이번 호에 싣기 바람.' 이렇게 써놓은 포스트잇 메모가 보였다. 흠, 윗분이 사적인 청탁을 받으셨나 보군. 심드렁하게 봉투를 열었다.
워드프로세서로 큼직하게 타이핑한 소설 제목 '전쟁사의 언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이태 지음'이란 작은 글자가 붙어 있었다. 설마 그분? 하며 첫 장을 펼친 나는 원고지 250매 분량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기록문학과 소설의 경계를 잇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곧장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전날 받은 작품의 몇몇 대목에 관해서, 그리고 대학 시절 읽은 '남부군'과 관련해 3시간 넘게 질문해대던 나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선생님, 앞으로 이런 작품을 계속 쓰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스물아홉 살의 나는 '남부군'의 작가 이태 선생님의 소설을 담당하는 편집자가 되었다.
저물어가는 나이란 그런 것이었나 보다. 군더더기 없이 명징한 문장을 구사하고 이야깃거리 역시 장강처럼 차고 넘쳤지만, 선생님은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옛날 남부군 여성 동지였던 이와 수표교 근처에서 스쳤던 일을 풀어내고 싶어요. 지리산 백무골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30년 만에 만났지만, 따라붙는 시선이 무서워 눈으로만 안부를 물은 채 엇갈렸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리산 세석평전의 가을을 보여주고 싶다고도 여러 번 말씀하셨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했지만 어떻게든 그곳에 올라 그지없이 좋은 억새와 단풍을 보여주고 싶다고. "꼭 가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막상 가을이 와서 선생님이 일정을 타진했을 때 나는 분주했다. "바쁜 일 먼저 끝내야지. 할 수만 있다면, 내년 가을에는 꼭 그곳의 장관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듬해 3월 초였다. 소설집 원고를 탈고하고 몸살을 앓으신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 몸이 가벼워졌다며 '작가의 말'도 바로 쓸 테니 '낼모레 만나자'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선생님의 부음을 전하는 TV 뉴스가 들려왔다.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이웃에 살던 동료 하나가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제야 나는 동료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잃을 수 있는 거구나. 돌이킬 수 없는 죄스러움이 이런 거구나.
그 후로 몇 번이나 지리산 근처에 갔으나 세석평전에 오르지 못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책장을 정리하면서도 선생님의 유고 소설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를 간직한 건 언젠가 이 책을 들고 세석평전에 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마지막 통화를 떠올리면 젖은 솜뭉치가 목구멍을 막는 듯 슬픔이 올라와서 떠나지 못했다. 이렇게 죄스러움을 고백하고 나면, 내년 이맘때는 빛바랜 유고집을 들고 그곳에 오를 마음이 생길까. 그럴 수 있기를 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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