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정치의 숙제, 불신을 먹고 자란 공포
시장의 공포심리 들불처럼 번져
민생 돌봐야 할 정치의 책임 커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뉴스룸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하반기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저항선인 1,400원 선을 지키지 못했고, 6개월 연속 무역적자가 이어졌지만 국민이 들어온 진단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매우 심각한 위기는 아니다' 정도였다.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이랬다. 제2의 IMF 사태가 닥칠 일은 없다. 외환보유고는 넉넉하고, 기업은 단단하다. 1997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기경보시스템은 발전했고 제대로 작동한다. 지금의 위기를 견뎌라. 터널의 끝은 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3고(고금리·고물가·고환율)로 요약되는 복합경제위기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컨센서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강원 춘천시 중도에 지난 5월 문을 연 테마파크 레고랜드의 사업주체 강원중도개발공사가 부도나고, 이어진 김진태 강원지사의 '기업회생 신청' 발언(9월 28일)과 이에 따른 채권시장 경색. 지자체인 강원도가 지급보증한 어음마저 만기를 넘기면서 개발과 건설을 위해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는 물론 공사채마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기에 이르면서다. 긴축의 고통과 유동성 위기가 상존하는 지옥. 사람들은 하나둘 1997년의 한보를, 2008년의 리먼 브라더스를 떠올렸다. 김진태 지사의 미욱한 대응 이후 시장은 보이지 않는 유령의 발에 밟히는 중이다. 시장의 불신으로 몸집을 키운 유령의 이름은 공포다.
시장에서 불신을 먹고 자라는 공포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은 생전 한 칼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인플레이션이 두렵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도 두렵다." 인플레이션뿐이겠는가. 채권시장 유동성 위기의 경우도 실체보다 앞서 다가오는 공포가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더 클 수 있다. 레고랜드 사태에서 비롯된 공포 심리는 이미 대다수 경제 주체들의 영역에 뿌려져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복합위기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주체는 단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발채무에 기대는 건설업계이다. 실제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 위기가 가시화된 지난 주말, 대형건설사 두 곳의 부도설이 돌았다. 급한 채무를 막아야 하는데 무형의 불신이 돈줄을 막아버리면서 빚어진 일이다. 곧바로 신용평가기관의 '만기가 도래하는 채무 대응은 대부분 가능'이라는 내용의 리포트가 나오며 급한 불은 꺼졌지만, 생기를 잃은 분양시장에서 중소 업체들은 얼마나 더 명줄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일까, 위기대응에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메시지로 일관했던 정부가 이번엔 한 스텝 빨리 움직였다. 채권시장이 요동치자 지난 일요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소집해 50조 이상 유동성 공급 대책을 발표했다. 이날 밤엔 여당과 정부, 대통령실 고위협의회가 열려 채권시장 대응을 모색했다. 쇼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27일에는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민생회의가 생중계됐다. 결과를 따지기에 앞서 '공포'를 제어하기 위한 조치였단 점에서 긍정적인 시도였다.
불신의 공포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최악을 막기 위해 정부의 행보가 부산해졌지만, 아직도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윤석열 정부 첫 국정감사 동안 대통령 시정연설을 보이콧하고, 비속어 낱말 맞추기와 막말대치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의원들이다. 시장의 공포가 어떤 형태로 경제를 위협할지 파악하고 당국의 효율적인 대응을 주문했어야 할 이들이 민생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정쟁에만 힘을 쓴 책임은 머지않아 국민이 물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에 레고랜드가 또 다른 한보그룹으로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정치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양홍주 디지털기획부문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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