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윤리강령 지키고 싶어도, 데스크가 안 바뀌면 소용 없어"
저널리즘의 위기를 극복할 방안의 하나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언론윤리 강화다. 이젠 저널리즘 활동의 결과물인 보도(콘텐츠) 자체를 넘어서 취재 과정 등 저널리즘 행위 전반이 대중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세미나·포럼 주제 국민제안’ 이벤트에서 접수된 60여건의 제안 중 ‘언론신뢰·보도윤리’(16.1%)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걸 보더라도 저널리즘 위기의 한 축인 신뢰의 위기를 극복할 키워드가 언론윤리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언론사 자체의 윤리 규범 확립은 저널리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많은 언론사가 자체 윤리 규범을 갖고 있지 않거나, 실효성이 없다는 데 있다. 언론재단이 지난 26일 개최한 ‘언론윤리강령 실태와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한목소리로 터져 나온 지적이다.
조소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언론사의 언론윤리강령 실태와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기자협회 회원사인 199개 언론사에 공문을 보내고 언론사 홈페이지와 인맥 등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각 언론사의 윤리강령을 확보했는데, 그렇게 분석 대상이 된 언론사는 회신율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18개. 나머지 언론사는 자체 윤리강령이 없거나 있어도 “내부 자료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기자협회 윤리강령이 있고, 지난해 한국인터넷신문협회와 함께 제정한 언론윤리헌장도 있다. 하지만 이를 준용하더라도 “각 규정을 언론인들이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가를 심사하는 담당 기구를 독립적으로건 겸업의 형태로건 사내에 설치 및 운영”하는 것이 “윤리강령의 실효성 확보를 위한 필수적 방안”이며, 이를 각 사가 자체 규범에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소영 교수는 강조했다.
“추상적인 표현들… ‘단호히 거부’? 어떤 게 단호한 건가”
윤리강령상 표현들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공통되게 지적됐다. 조 교수는 “실제로 구체적인 지침이 돼야 하는데 추상적”이라며 “‘부당하면 안 된다’ ‘합리적이어야 한다’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등등. 어떤 게 단호한 걸까, 어떤 게 부당한 걸까”라고 꼬집었다.
현직 기자들의 인식도 비슷했다. 이영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가 18명의 현직 기자를 대상으로 언론윤리강령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이 필요하다는데 크게 공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언론사 최초로 자체 윤리강령을 만들었고(1988년), 지난해 취재보도준칙을 전면 확대·개편한 한겨레신문의 권태호 저널리즘책무실장도 “명확성이 부족하고 두루뭉술하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권 실장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취재보도준칙에는 ‘기사에 2명 이상의 익명 취재원을 담지 않는다’고 돼 있는데, 한겨레는 ‘가급적 익명 취재원 허용을 삼간다’는 식이다. 한겨레 기사에선 한 기사에 익명 취재원이 2~3명일 때도 많은데, 워싱턴포스트처럼 하면 기사를 못 쓸 거다”라고 말했다.
강제성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권 실장은 “보통 법조문은 어떤 규정 위반 시 처벌 조항이 있지만, 강령이나 준칙은 ‘안 한다’ ‘삼간다’ ‘자제한다’ 식으로 처벌의 강제 규정이 없고 케이스바이케이스이기 때문에 이걸 만약 처벌하거나 강제하면 내부적으로 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구체적이지 않고, 강제성도 없으니 당연히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권 실장은 “두 가지 기로에 있다”며 아주 모범적인 우아한 강령을 만들고 사문화(死文化)하는 형태로 갈 거냐, 아니면 (수준이) 너무 높으니 떨어뜨릴 거냐. 현재로선 엉거주춤 하는 상태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자들 구체적 사례별 교육·체크리스트 등 원해
그래서 나온 제안이 체크리스트다. 현직 기자들 조사에서도 세부적인 사례별 맞춤 교육이나, 체크리스트를 활용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이영희 교수는 “코로나19가 심각할 때 최근 방문지나 증상 유무 등을 체크해야 시설 입장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도시스템을 열 때마다 체크하도록 하면 강제적으로 (윤리강령을) 인지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실제로 KBS는 올 초 ‘신뢰 저널리즘을 위한 취재제작실무’를 펴내며 보도 분야 방송사고를 막기 위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체크리스트 등을 만들어 내부 구성원들로부터도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겨레 역시 기존의 취재보도준칙과 별개로 10개 정도 항목의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걸 고안하고 있다고, 권태호 실장은 전했다.
윤리규정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주기적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많은 참석자가 공감했다. 그러나 자체 윤리강령에 교육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 언론사는 분석 대상 18개 언론사 중 단 두 곳, TBC와 부산일보뿐이었다. 대다수 언론사는 윤리 관련 현행 교육 시스템이 거의 없고, 취재보도 실무와 마찬가지로 도제식 교육이 주를 이룬다. 이영희 교수는 “특정 선배의 개인 신념에 의해 윤리교육의 방향이 좌우되곤 한다”며 “체계적인 걸 배우기보다 윤리적인 제한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사고 안 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다”고 했다.
현직 기자들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방안을 찾아가는 식의 사례별, 토론식 교육을 주로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도 “케이스스터디가 필요하다”며 “이슈별 보도 과정과 (보도로 인한) 왜 피해가 커졌는가에 대해 언론사들이 같이 모여 하는 케이스스터디를 윤리강령과 별도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도제식 교육은 그만… “데스크 등 관리자 교육이 더 중요”
다만 윤리교육이 현재는 언론사 입사 때 수습기자 등을 대상으로만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직급별 교육이나 데스크 등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언급이 많았다. 임주현 KBS 기자는 “내가 (윤리강령을) 지키고 싶어도 나를 데스킹하는 결정권자들이 바뀌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며 “다행히 의식 있는 분이 데스크가 되면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지만, 아닌 분이 되면 지킬 수 없다. 기자 개개인에 맡길 게 아니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기자는 언론사가 “사회 변화 속도를 못 따라간다”며 윤리강령과 의식의 지속적인 업데이트 필요성과 함께 윤리강령 실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채찍뿐 아니라 당근책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기자는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 등에서 (윤리강령 등) 여러 지표를 통해 괜찮은 곳이라고 평가되면 가산점을 주고, 각 언론사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는 기자 개개인에게 인사고과에서 플러스를 줘야 한다”며 “넌 기자고 언론사는 사회적 공기니까 윤리의식을 탑재해야만 해, 이렇게 강요만 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기자들의 윤리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믿을 만한 뉴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데스크 실명제’를 도입한 쿠키뉴스. 민수미 쿠키뉴스 기자는 언론계 안팎에서 호평받은 것과 별개로 “데스크들은 조금 더 꼼꼼하게 기사를 체크하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취재, 작성 등에 신경을 쓰게 됐다”고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했다.
민 기자는 그러나 “속보나 단신의 경우 예민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시간 압박 탓에 기자들이 윤리강령을 참고하는 비율이 크게 떨어졌다”면서 “모든 딜레마에 맞춰 준칙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기자 개인의 윤리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고, 개인차가 크게 난다는 것도 고민”이라고 전했다. 이어 “사회나 독자 인식 변화를 언론사 윤리강령이 기민하게 따라갈 수 없는 점, 윤리강령이 학문처럼 느껴져 기자 업무 적용에 활용도가 낮다는 평 역시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라며 “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 찾고 시도한다면 우리의 진심이 독자에게 닿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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