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 거리가 거대한 미술관…카타르의 ‘예술적 카타르시스’

노형석 2022. 10. 2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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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달 월드컵 앞 거대한 문화이벤트
세계적 거장 수십명 작품 즐비
중동 문화허브·국제미술 거점 시도
아라비아의 사막에 들어선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거대 설치작품 ‘하루의 바다를 여행하는 그림자’.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북서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알 주바라 유적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노형석 기자

뜨거운 물결 속으로 서늘한 역사가 굴러다녔다.

신드바드의 모험과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로만 기억했던 아라비아반도의 구석진 해변은 그저 사막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아니었다.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옛 도시의 유적과 유물들의 자취가 곳곳에 널린 놀라운 역사의 텃밭이었다.

지난 24일(이하 현지시각) 낮 탐방한 카타르 북서쪽 알주바라 해변에는 찌를 듯한 열사의 태양 빛을 받으며 쉴 새 없이 아라비아만의 바다 물결이 밀려왔다. 관람용 데크에서 해변으로 내려가 그 물결 속에 손을 맡겼다. 고대부터 생겨나 18~19세기 진주조개잡이로 당대 중동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를 쌓으며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알주바라 해안 도시 유적과 집 담장의 벽돌들이 해초와 뒤얽혀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거대 작품 ‘하루의 바다를 여행하는 그림자’의 일부분. 노형석 기자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거대 작품 ‘하루의 바다를 여행하는 그림자’의 거울판 쉼터 아래서 낙타가 대기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카타르 반도의 북서쪽 바닷가에 있는 알 주바라 유적의 일부분. 고대부터 근세까지 실크로드의 고급교역품인 진주 조개 잡이로 번성했던 옛 해안도시의 흔적이다. 바닷가까지 뻗은 거대한 도시 유적의 자취들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있다. 노형석 기자

데크 위로 올라가 봐도 온 사방 100만평은 넘을 듯한 해안 대지 일대가 모두 집터와 사원터, 시장터 등의 폐허로 채워져 있었다. 유난히 허연 사막의 먼지만이 담과 마을을 지켰던 동그란 요새, 그리고 통행로의 자취를 뒤덮고 있을 뿐인데, 바로 이런 모래바람으로 방치된 덕분에 세계의 해안 도시 유적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개발의 광풍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쇠락되고 묻힐 당시의 비경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유네스코가 이곳을 카타르의 유일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배경이 그것이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여는 중동의 반도 나라 카타르는 지금 축구에만 몰입하고 있지 않다. 세계 미술시장을 주름잡는 큰손 실력자인 셰이카 알마야사 공주가 수장을 맡고 있는 카타르 정부의 박물관청(QM·Qatar Museums)이 다음달 열리는 월드컵(11월20일~12월18일)을 앞두고 특별하고 거대한 시각문화 이벤트를 기획했다. 전세계 관객들에게 카타르의 전통 문화유산과 공공미술 같은 시각문화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카타르 크리에이츠’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현대미술 거장 수십명을 초청해 대규모 공공미술과 전시 프로젝트 현장을 이달 들어 잇따라 내놓고 있다. 카타르 박물관청은 이와 관련해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문화예술 관련 언론인 40여명을 초청해 ‘카타르 크리에이츠’의 주요 현장과 작가와의 대화 무대를 공개했다.

카타르 반도의 북서쪽 바닷가에 있는 알 주바라 유적. 18~19세기 진주 조개 생산으로 부를 일궜던 옛 해안도시의 자취가 광대한 사막과 해변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해변 도시의 주요 유적이 재개발에 허물어지지 않고 모래에 덮여 온전히 보존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점이 높이 평가돼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노형석 기자
카타르 수도 도하 도심 코니시 거리에 들어선 미국 팝아트 거장 제프 쿤스의 공공조형물 ‘듀공’. 바다의 소로도 불리우는 듀공이 파도와 해초 위에 뜬 형상이다. 스테인리스 강철을 재료로 삼아 반들거리는 풍선의 질감으로 만든 이 작품은 높이 21m, 너비 31m에 달한다. 노형석 기자

우선 취재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사막에 펼쳐놓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대규모 설치작업이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화두를 과학기술과 결합된 기발한 틀거지의 조형물 작업으로 표출해온 덴마크 출신의 꾀돌이 현대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과 레바논의 조형예술가 시모네 파탈, 브라질의 생태예술 대가 에르네스투 네투가 수도 도하 북쪽으로 100㎞ 이상 떨어진 사막지대 알주바라에 독특한 의미와 개성을 지닌 신작들을 24일 개막 행사를 시작으로 대중 앞에 펼쳐놓았다. 고대에 실크로드 교역의 대상인 진주를 캐려고 진주조개잡이가 성행했던 곳으로 거대한 해안 도시 유적이 펼쳐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지구 인근을 세 작가는 각기 색다른 화두로 파고들어갔다.

피필로티 리스트가 국립카타르박물관에 선보인 ‘너의 뇌가 나에게, 나의 뇌가 너에게’. 노형석 기자
카타르 사막에 원과 반원형 거울로 된 조형물을 설치한 올라프 엘리아손. 지난 24일 오전 도하 시내의 이슬람예술박물관(MIA) 강당에서 작업에 대해 일어서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작가를 바라보는 이가 설치작업을 지원한 카타르 왕실의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 노형석 기자

특히 엘리아손은 이 지역에서 옛부터 채취해온 진주알의 모양새와 상통하는 원과 거울판을 덮어씌운 반원들의 실물들로 사하라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목민 텐트 분위기의 거대한 그늘 쉼터를 만들었다. 지름이 10m를 넘는 20개의 원형 거울판을 반원형의 철제 구조물이 받치면서 거울에서 자연스럽게 온전한 원형을 비춰 보이게 만든 반지(링) 얼개의 쉼터가 핵심이다. 그 주변에는 3개의 단독 원형 링과 서로 겹치는 2개의 이중 링이 마치 어미와 새끼처럼 정연하게 대칭되는 축을 이루면서 놓여 있다. 한가운데 놓인 10개의 거울판 쉼터는 이슬람 사원의 오각형 무늬와도 잇닿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열사의 하늘과 대지를 배경으로 정연하게 배치된 독특한 모양새의 설치작품들을 만든 셈이다. 그 안에서 관객들은 대지에 발을 딛는 자신들의 모습이 거꾸로 땅이 훨씬 더 높은 위치가 되어 비쳐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과 인간, 문명의 관계,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장된 감각을 가지고 주시하게 된다. 사막의 땅 표면과 땅을 딛고 선 관람객들이 기하학적인 원과 반원을 덮은 거울면을 보면서 역사와 인간, 문명을 성찰하게 하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엘리아손은 이에 대해 24일 오전 도하 시내 이슬람예술박물관에서 열린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와의 대담을 통해 “사막에 천막을 세워 그늘을 만들어놓고 낙타들이 쉬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원과 반원, 거울로 된 감각의 쉼터를 구상했다. 지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고 서로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각과 인식을 새롭게 하는 작품이 되길 바라며 작업했다”고 밝혔다.

카타르 북부 사막지대의 촌락 아인 무하마드 부근에 설치된 에르네스투 네투의 설치작품 ‘지구사원, 지구를 위한 송가’. 지난 24일 오후 작품 핵심인 풀들이 자라는 지구본 모양 세라믹 구 앞에서 작가가 명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관객들이 차에서 내려 먼지바람 이는 땅 위를 순례자처럼 걷거나 낙타를 타고 찾아가야 하는 독특한 관람 방식도 흥미롭다. 세라믹 구 모양에 틈틈이 풀들이 자라나는 지구의 형상을 중심으로 한 그물망 공간에서 명상을 권하는 네투의 작업과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이 팬 푸른빛 암석의 산 같은 덩어리들이 석양 녘 사막의 지평선과 조화를 이룬 파탈의 작업도 뚜렷한 잔상을 남겼다. 도하에서 서쪽에 있는 제크리트 사막 지대 인근에 리처드 세라가 1㎞ 거리로 일정 간격을 두고 세운 커다란 강철판 4개의 기념비적 연작인 <이스트-웨스트/웨스트-이스트>가 2014년 이미 설치된 바 있다. 고대 도시 유적과 엘리아손 등의 신작들이 있는 알주바라와는 남쪽으로 70~80㎞ 거리여서 이번 신작 설치는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 카타르의 새로운 성지순례 코스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건축거장 장 누벨이 사막 장미에서 영감을 얻어 수백여개의 꽃잎 모양 콘크리트 판들을 겹쳐 외양을 만든 국립카타르박물관의 전면. 노형석 기자

도하 시내 마천루 빌딩군을 마주 보는 카니시 해안 공원에는 세계적 대가들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펼쳐져서 눈길을 끌었다. 특히 세계 현대미술계의 실력자로 꼽히는 미국 거장 제프 쿤스는 카타르의 상징 동물이자 세계적인 희귀종인 듀공(해양 초식성 포유류)을 신비스러운 자색빛을 발하는 거대 풍선 모양 조형물로 만들어 날카롭게 솟은 마천루를 마주 보게 하는 한시적인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바다소’란 별칭을 지닌 듀공이 파도와 해초 위에 떠서 헤엄치는 형상을 한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 강철을 소재로 삼아 반들거리는 풍선의 질감으로 만들었다. 높이 21m에 너비 31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와 마천루를 배경으로 헤엄치는 인상적인 외관 덕분에 이달 설치된 뒤 단박에 행인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독일의 설치미술가 이자 겐츠켄이 만든 난초 형상의 공공조형물도 취재진의 주목을 받았다. 난초꽃의 연약한 이미지와 다르게 산업재료로 강건한 인상을 풍기는 거대한 난초꽃대를 세워 전면의 고층빌딩군과 색다른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카타르 박물관청은 이외에도 독일의 카타리나 프리치, 스위스의 우고 론디노네, 인도의 실파 굽타, 한국의 강서경 작가 등 세계 유명 작가들 신작 40여점을 포함한 예술 작품 100여점을 수도 도하의 시내 곳곳에 설치해놓았다. 2014년 카타르 관문 하마드 공항에 설치된 스위스 작가 우르스 피셔의 자이언트 테디 베어부터 2019년 카타르 축구팀의 아시안컵 우승을 기념해 도하 도심 수크 와키프 야시장에 세운 프랑스 거장 세자르 발다치니의 거대 손가락상에 이르는 기존 설치작품들까지 망라해 다채로운 공공조형물의 잔치로 세계 굴지의 거대한 야외 거리 미술관이 되는 것이다.

독특한 콘텐츠를 자랑하는 여러 국공립 미술관의 의욕적인 전시회들도 차려졌다. 세계적인 건축 거장 아이엠 페이의 말년 걸작으로 유명한 도심 포구의 이슬람예술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을 설계한 이들 가운데 한명인 장 누벨이 꽃잎 모양으로 만들어 한국 현대건설 시공으로 2019년 완공한 카타르 국립박물관, 아랍현대미술관(Mathaf), 아트밀뮤지엄, 3-2-1 카타르 올림픽 및 스포츠 박물관, 디자인 허브 M7 등에서도 독창적인 콘텐츠 전시들이 펼쳐졌다. 주목되는 건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 거장들이 잇따라 카타르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2016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사회적 건축을 세계적 트렌드로 이끈 주역인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26일 도하 도심 항만 지구에 있는 밀가루 제분공장에서 세계 취재진과 만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털어놓았다. 이 제분공장의 사일로 구조물이 지닌 건축적 에너지의 기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교육시스템과 전시, 아카이브 기능이 결합된 독창적인 콘셉트의 아랍 현대미술관을 2030년 개장을 목표로 만들겠다는 내용이었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리모델링 디자인으로 유명한 스위스 건축거장 자크 헤어초크와 피에르 드뫼롱이 아랍권 유목민의 전통적인 건축 구조에서 모티브를 얻어 내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는 교외 루살리 미술관 프로젝트와 거장 렘 콜하스가 이끄는 오엠에이(OMA)의 자동차박물관(오토뮤지엄) 구상도 현란한 특설 전시와 함께 공개돼 취재진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이탈리아 럭셔리 오트 쿠튀르 패션 브랜드인 메종 발렌티노는 카타르 뮤지엄과 함께 창업자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대형회고전 ‘포에버 발렌티노’를 27일 개막하기도 했다.

한해 수억달러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세계 최고의 컬렉터 중 한명으로 꼽히는 셰이카 알마야사 공주가 카타르의 스마트 문화국가를 목표로 추진 중인 크리에이츠 프로젝트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에 연계된 문화예술 행사는 아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중동의 문화 허브, 나아가 세계 미술계의 주요 거점으로 도약하겠다는 카타르 정부와 왕실의 치밀한 전략, 강력한 의지와 열정을 프로젝트 현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카타르와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권 젊은 작가의 스튜디오와 창작 공간에도 관심을 집중해 확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나자다 작가 스튜디오, 리완 디자인 스튜디오랩 등 현지 공공 작업실 방문 등을 통해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 기구나 특정 왕족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하향식 문화 진흥 사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목은 한계점으로 비쳤다. 대중적 기반을 충실하게 구축하지 않은 채 위정자가 주도하는 문화국가 전략은 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까닭이다.

카타르/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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