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 이끈 인간의 ‘여행 본능’[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22. 10.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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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계림로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 보검. 멀리 카자흐스탄 지역 왕들이 쓰던 것이 실크로드를 통해 수천 km를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누가 가져왔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동서고금의 이름 모를 수많은 여행자가 인류 문명 교류사를 만들어온 것이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당나라 시절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서역인을 그린 당삼채. 당시 대부분의 여행은 곧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었다. 강인욱 교수 제공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3년 가까이 끌어오는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우리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한편으로는 빠르게 오르는 물가에 한숨을 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행 사이트를 검색하는 우리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인류의 탄생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여행을 해왔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려 하는 욕망은 태곳적 인류가 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있어 왔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아프리카 떠나 세계로 간 인류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이 네안데르탈인을 탐구한 스반테 페보에게 돌아갈 정도로, 인류의 기원은 다윈의 진화론이 채택된 이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연구가 쏟아지는 고인류학계이지만, 한 가지는 공통된 의견이 있다. 바로 인류는 몇 차례에 걸쳐 아프리카를 떠나는 장대한 여행을 거쳐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180만 년 전 무렵 호모 에렉투스가 사하라 사막을 넘어 근동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두 번째, 약 60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인 하이델베르크인들이 아프리카를 나와서 유럽과 아시아로 퍼졌다. 마지막으로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가 10만 년 전(최근에는 20만 년 전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아프리카를 나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인류는 마지막 남은 미개척지인 신대륙 아메리카에마저도 1만7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 정착하여 지금의 인류세를 이루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 연구로 복잡하고 말도 많은 인류의 기원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이 있으니,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해왔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은 바로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목숨을 걸고 이동한 사람들의 여정이다. 그렇게 새롭게 자신의 터전을 찾아서 정착한 인류만이 생존했다. ‘역마살’이라는 단어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안 좋게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빙하기가 끝나고 농사를 짓는 마을이 발달하며 생긴 관습이다. 목숨을 걸고 떠날 수 있었던 인류의 용기가 우리의 진화를 선도했다.

신라에 온 ‘카자흐 왕’의 보검

근대 이후 관광이 발달하면서 여행은 낭만과 힐링의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여행은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그것은 국가가 파견하는 사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역사에서도 발해가 일본으로 파견하는 사신은 험난한 동해를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가 부지기수였다. 발해는 8세기에 100년간 16회의 사신을 보냈는데, 그중 절반인 8회는 표류하거나 난파를 당했다. 배가 전복되어 40여 명이 수장되거나 심지어 잘못 기착해서 아이누인들에게 사절단 전체가 살해당할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던 장건도 흉노에게 잡혀 10년 넘게 묶여있었다. 그리스 최초의 서사문학인 오디세이나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모험으로 가득 찬 이야기처럼 여행은 곧바로 기약 없는 길이었다. 국가의 사절단이 이럴 정도인데 하물며 이름 없는 수많은 여행가들의 희생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인간의 여행에 대한 욕망은 죽음의 공포를 넘었으니,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했고, 또 교류했다. 현장, 마르코 폴로, 혜초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행가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이름 대신에 그들이 전해준 유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머나먼 지역에서 온 유물들이 뜬금없이 발견되곤 한다. 얼마 전 크림반도에서는 3000년 전 중국 주나라 전사가 쓰던 칼과 창이 나왔다. 또한 트로이 유적에서는 만주 일대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말의 재갈과 청동 무기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름이 남아있지 않았을 뿐,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끊임없이 여행했고 새로운 물건을 전해주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신라의 고분에서는 멀리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왕들만 쓸 수 있었던 황금 보검이 나왔다. 직접 사람이 다녀오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유물이다.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보이지 않게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다.

죽음은 영원 위한 여행의 시작

왼팔에 사자, 오른손에 뱀을 든 길가메시(추정)의 모습. 이라크 두르샤루킨의 아시리아 제국 유적지에 남아 있는 부조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화에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길가메시’가 전해진다. 실제로 4800년 전에 수메르의 도시 중 하나인 우루크를 다스리던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떠난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리던 길가메시는 절친인 엔키두의 죽음을 목도하고 영생을 얻고자 여행을 떠났다. 중국의 진시황은 영생을 얻고자 사방을 헤맸다. 물론, 그의 노력은 여행 중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흥미롭게도 길가메시뿐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새겨진 설형문자 점토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1년 이라크 걸프전의 과정에서 이라크 박물관에 소장 중인 길가메시의 점토판은 도난당해서 수많은 나라를 거친 끝에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을 거쳐 이라크로 반환되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으로 길가메시 못지않은 역정을 거친 셈이다.

영생을 찾아가는 여행은 수천 년간 인간의 머릿속에 함께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었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이 메텔이라는 여성의 도움을 받아 영생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 원작은 미야자와 겐지(1896∼1933)라는 작가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인데, 사랑하는 동생의 요절이 동기가 되었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공포인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인간의 지혜였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수많은 무덤들은 궁극적으로 죽은 사람이 영원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다. 쉽게 지나치는 우리 주변의 유물에도 영원으로 떠나는 여행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암각화인 울산 울주군 반구대에도 영원을 향해 배를 타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가장 높은 곳, 태양이 있을 법한 위치에 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태양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나는 암각화는 북유럽과 시베리아의 바닷가 암각화에서 흔히 발견된다. 고래잡이를 하던 사람들답게 저승으로 떠나는 길을 머나먼 바다 끝으로 떠나는 사람들로 묘사한 것이다. 유목민은 사람이 죽으면 특이하게 옆으로 구부린 채 묻었다. 그 이유는 바로 옆에 함께 묻힌 말의 뼈로 밝혀졌다. 같이 묻은 말은 머리에 뿔을 단 하늘의 말(천마)이다. 망자는 기마 자세로 묻혔던 것이다. 죽어서 저승에 천마를 타고 떠나라는 바람인 것이다. 인류는 죽음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여행으로 생각하여 그 공포심을 달래 왔으니, 여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받은 셈이다.

인류 진화의 과정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났기에 지금 인류가 살아남은 것이다. 여행의 본능은 우리의 DNA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은 여행에 대한 인간의 진화를 선도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자신의 영생과 낙원을 꿈꾸어 왔다. 여행을 꿈꾸는 것, 그것은 인간의 특권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의 공포를 넘어서 다시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여행에 대한 갈망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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