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존재로서의 쌀

기자 2022. 10.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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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모이는 날은 콩이나 보리를 넣어 잡곡밥을 주로 하지만 이맘때는 ‘쌀밥주간’이다. 햅쌀밥에 명란을 얹어 먹는 건 나의 호사, 햄구이 한 조각 얹는 것은 아이들의 호사지만 햅쌀의 차진 밥맛에 바치는 헌사로 잠시나마 세대 통일을 이룬다. 수확철을 맞아 자못 다복한 식사 풍경이 연출되었으나 우리 쌀의 처지는 몰릴 대로 몰렸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여느 해와 달리 ‘쌀’ 하나로 모든 정치인들과 대통령까지 한마디씩 보태는 중이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는 국민적 관심도 높은 편이 아닌 데다 농어촌에 정치적 기반을 둔 여야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곤 해서, 대체로 순둥순둥했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는 쌀값을 놓고 여야가 상임위원장의 의사봉을 낚아채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상정해서다. 초과 생산된 쌀의 하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쌀을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정부매입을 의무화 조항에 넣자는 것이 골자다. 기준은 딱 정해져 있다. 수요예측량보다 생산량이 3% 이상 높거나, 쌀 가격이 과거 5개년 평균보다 5% 이상 떨어졌을 때 의무 매입하자는 것이다.

이에 여당인 국민의힘은 포퓰리즘, 공산화법이라 과잉 반응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농민에게 도움이 안 되는 법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하겠다 하면서 단번에 ‘양곡관리법’이 농해수위 담을 넘어 시사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 쌀값을 보장해주니 농민들이 쌀농사를 더 짓지 않느냐며 논농사를 짓는 농민을 나무랐다. 열흘이면 기계가 다 지어주는 벼농사, 판로까지 보장해주면 다른 작물로는 안 간다는 말을 뱉는 ‘차가운 도시남자’의 말의 발화자는 농정의 수장인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이다. 한순간에 농민을 대책도 없이 농사지어놓고 팔아달라 생떼를 쓰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전후사정 따져보면 2020년 벼 가격을 최소한도로 지지하던 변동직불제를 폐지할 때 농민들에게‘시장격리제’를 잘 실시할 테니 걱정 말라고 3%, 5% 하는 비율까지 정해준 곳이 농식품부다. 정권 바뀌었고 지금 정부의 사람이니 무효라고 선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오래도록 한국의 농업 공무원으로 살아온 농식품부 장관의 말이 너무 차갑다. 매 맞고 돌아온 아이에게 네가 못나서 맞은 거라며 한 대 더 때리는 격이다. 그렇다고 시장격리제도를 만들자고 나섰던 전 정권의 위정자들도 잘한 건 없다. 그때 ‘의무화한다’라는 그 한마디를 넣어야 한다는 농민들의 요구에 뒷짐 지고 있다가 이제야 굼뜨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쌀소비량은 56.9㎏. 하루에 공깃밥 두 개도 먹지 않는다. 소비는 줄어드는데 계속 쌀농사를 고집하는 미련한 농민들을 탓하는 기조가 만들어진 지는 오래다. 이에 빵이나 국수 만드는 가루용 쌀인 ‘분질미’에 사활을 걸어보겠다는 것이 정부의 심산이다. 안 그래도 밀가루를 수입하느라 국부 유출도 되는 마당에 신토불이 우리 쌀로 만든 빵과 국수를 먹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납득이 된다. 납득이. 그래서 쌀가루로 만든 쌀빵 경진대회와 시식회를 곳곳에서 열고, 몇몇 가공업체는 신이 났다. 밀가루 빵보다 속도 편하고 맛도 좋다며 곳곳에서 찬사가 보태진다. 우리 쌀 소비를 촉진하자는 데 반대할 이는 없다. 다만 수입밀 대신 우리 땅에서 길러진 ‘우리밀’로 먹자며 기른 우리밀 자급률도 고작 1%인데도 우리밀 소진도 어려워서 우리밀 농가도 애를 먹는다. 원가 문제로 수입밀이 우리밀로 대체가 안 되는 판에 쌀로 빵을 만들자면 과연 단가를 맞출 수나 있을지 명쾌하지 않다.

양곡은 ‘식량’ 자체이자 쌀을 뜻한다. 고령의 농민들은 쌀을 ‘순곡’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애면글면 애지중지한 ‘존재로서의 쌀’이다. 논이 있고, 농사지어 양식을 마련한다는 고집스럽고 촌스러운 마음을 나무랄 자 누구인가.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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