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보면 볼수록 만만찮은 호떡 연대기

기자 2022. 10. 2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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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든 호떡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서 먹어야 한다. 한 입 베어 물면 꿀이 꿰져 나와 뚝뚝 떨어진다. 그 꿀이 입에서는 뜨거운 줄 모르는데, 손등에라도 떨어지면 몹시 뜨겁고, 핥아먹고 나면 살갗이 알알하다./ 이 꿀 든 호떡을 먹노라면, 입가에 검은 꿀이 묻어서 물에 씻어야 지워졌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일평생 아동문학에 매달려 살다 간 어효선(1925~2004년)이 남긴 호떡 이야기 한 도막이다. 혓바닥 데는 줄 모르고, 입천장 까지는 줄 모르고 먹는 호떡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통칭 ‘중국 사람들’, 곧 화교가 꽉 잡고 있었다. 화교가 이 땅에 들여온 음식이니 그럴 수밖에. 굽는 풍경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어효선의 회고에 따르면 호떡은 화교의 중국집에서 팔던 음식이었다. 호떡집에는 벽돌로 쌓고 흙으로 미장한 부뚜막이 있다. 호떡은 부뚜막 위에 놓인 둥근 철판에서 애벌구이한다. 그러고는 불이 이글이글 타는 화덕에 빙 둘러 넣어서는 속을 고루 익혀 완성했다. 그때는 설탕소 말고 팥소도 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팥 든 것보다 검은 설탕 든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팥 든 호떡은 지름이 10㎝, 설탕 든 호떡은 얇아도 지름이 15㎝였다. 아이들은 찐득한 흑갈색 설탕소를 ‘꿀’이라 부르며 신나게 호떡을 먹어치웠다. <수정증보 조선어사전>(1940년) 또한 호떡을 일러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둥글넓적하게 만들고 속에 흑설당이나 혹은 팥 소를 넣어 철판에 구운 떡”이라 했으니, 전에는 딱 한 가지 호떡이 다가 아니었음을 익히 알 만하다.

한반도 화교 사회의 큰 인물 진유광(秦裕光·1916~1999)의 회고도 재미나다. 진유광은 옛 화교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던 호떡 일곱 가지를 이렇게 손꼽았다. 1) 안쪽은 달걀흰자를 바르고 겉에다는 달걀노른자를 발라 굽는 팥소빵인 지단빙(雞蛋餅, 계란빵), 2) 칼로 꽃모양 낸 주화빙(菊花餅, 국화빵), 3) 납작한 화덕구이 빵인 가오빙(烤餅), 4) 흑설탕소 넣고 구운 탕훠샤오(糖火燒, 당화소), 5 )산동식 빵인 강터우(杠頭), 6) 팥소 넣고 겉에 깨를 묻힌 쯔마빙(芝麻餅, 참깨빵), 7) 한국어로 ‘공갈빵’이라 하는 탕구쯔(糖鼓子)이다. 화교 3세 연구자 주희풍은 여기다 러우훠샤오(肉火燒, 고기호떡)ㆍ수훠샤오(素火燒, 채소호떡)ㆍ차아쯔훠샤오(叉子火燒, 소 없는 호떡)를 더해 한국 호떡의 유래를 설명한다. 이 가운데 한국인이 선택한, 한국 호떡의 할아버지 격 되는 화교의 호떡은, 탕훠샤오이다. 요리나 면(麵)보다 쉬운 호떡 기술은 자연스럽게 한국인에게 넘어갔다. 성장을 거듭한 한국 제분·유지·제당 산업과,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한국인은 1960년대를 지나며 더욱 본격적으로 길거리에서 만났다. 한국인은 부뚜막·화덕과 애벌·재벌 구이를 버리고, 싸게 공급되는 기름을 쓰는 쪽으로 호떡을 끌고 갔다.

이제 중화권에서는 한국 호떡을 ‘한국흑당병(韓國黑糖餠)’으로 부르며 중화권의 호떡류와 구분한다. 일본인은 이를 ‘한국홋토쿠(韓国ホットク)’로 부르며 한국 명물로 친다. 보면 볼수록 만만찮은 연대기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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