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꽃도둑의 눈
자고나면 갓 핀 꽃송이가 감쪽같이 없어지더니
밤새 금잔화 꽃숭어리만 뚝 따먹고 가더니
이 눔이 좀 모자란 놈인가, 시 쓰는 놈 혹시 아닐랑가
서리태 콩잎보다 향기로운 꽃을 좋아하다니
이 눔 낯짝 좀 보자 해도 비 온 뒤 발자국만 남기더니
며칠 집 비운 새, 앞집 어르신이 덫 놓고 널빤지에 친절하게도 써놓은
‘고랭이 조심’에도 아랑곳없이 밤마다 코밑까지 다녀가더니
주야 맞교대 서로 얼굴 볼 일 없더니
어느 아침 꽃 우북한 데서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나 놀란 이 꽃도둑
후다닥 논틀밭틀로 뛰어가는데
아 참, 도둑의 눈이 그렇게 맑다니
- 시 ‘꽃도둑의 눈’, 김해자, 시집 <해자네 점집> 중에서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들깨를 베고 있는데, 윗밭 언니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올라오다, “그래 댁의 콩은 괜찮수?” 묻길래, “갸가 팥도 먹대유.” 했더니, “이그 올핸 호박도 하나 못 건지고… 감자는 멧돼지가 캐고 콩은 고라니가 따고…” 중얼중얼대면서 지나갔다. 고라니 입 닿은 데마다 잎도 없이 앙상한 가지들만 삐죽 솟은 데다, 살아남은 순들도 허옇게 말라가는 서리태와 팥 몰골이 말이 아니다. 한창 기세 좋게 뻗어가던 앞집 둔덕의 형편없이 뜯겨나간 호박순 앞에서, 낫 지나간 자리처럼 서리태 순들이 가지런히 도려져 있는 아랫집 콩밭에서도 고라니 새끼는 등장한다. “못 먹는 게 없슈. 고춧잎도 따먹는다니까.” “이놈의 시끼 잡히기만 해봐라” “새까만 게 얄미워 죽것어” 소리 듣고 사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이라는 고라니 신세도 참 딱하다.
이 언덕에서 100m쯤 아래, 그러니까 동네 한복판에 살 때는 고라니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꽃도 따먹고 막 올라오는 콩잎도 따먹고 상춧잎도 따먹는데 매번 놀라웠다. 눈이 얼마나 밝으면 그 캄캄한 데서 어찌 그리 여린 순만 잘도 골라 따먹는지. 만나면, “다 건드리지는 말고 몇 개만 정해놓고 따먹어라, 그래야 나도 먹고살지” 협상을 해보려도 불가능했다. 활동하는 시간대가 달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나는 나대로 심고 고라니는 고라니대로 따먹고. 어쩌다 마주쳐도 후다닥 뛰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니 말 걸 새도 없다. 앞에 없는 고라니에게 “이놈의 시끼 여기저기 다 찝적거려 놓고” 혼자 혼낼 수밖에. 동네 어른들 말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독이 있어서, 입에 닿으면 작물들이 시름시름 앓다 제대로 일어서기 힘들단다. 풀약도 비료도 안 치지, 대문도 없고 철망도 하지 않은 그 마당이 고라니에겐 시장기 돌 때마다 들르는 단골식당 아니었겠나. 그즈음 몇 집 건너 백옥같이 흰 토끼와 까만 토끼 한 쌍이 탈출해 우리집을 드나들면서 그나마 밭꼴을 유지하던 내 텃밭은 ‘아작’이 났다.
그제 밤, 잠시 걸으려고 밖에 나갔는데 30여m 지척에서 갑자기 짐승 소리가 났다. 처음엔 동물 쫓으려고 틀어놓는 개소리인 줄 알았다. 서너 번 듣고 보니 아니었다. 쫓는 소리는 쫓기는 자의 처철함이 없으니까. 이어지는 간헐적인 비명에서 덫에 걸린 고라니가 연상되었다. 다리가 절단나는 엄청난 고통이 아니고는 그런 소리가 날 수 없다. 결국 10분도 못 걷고 다시 집 안으로 피신하고 말았지만 이미 들은 비명은 귓속에서 삭제되지 않았다. 내가 저 풀숲의 고라니라면, 내가 불꽃 튕기며 불도저에 베어지는 숲의 나무라면, 내가 반죽기계 속에 남겨두고 온 피칠갑 된 손이라면….
미안함과 죄의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구나. 빵 하나 사 먹으면서도 그 빵을 만들다 죽은 누군가가 내 속으로 들어오고, 생명을 먹여 살린다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쇠그물 치고 쇠판 덧대어 문을 달고서도 덫에 걸린 누군가의 비명을 들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구나. 생태살해와 인권살해는 한 잎의 앞뒤였구나.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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