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파괴본능과 예술치유의 관계항
전쟁의 광기는 세계 경제를 요동치게 하고 문화까지 말살한다. 문화만이 이런 광기를 치유한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히틀러의 전쟁 광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묻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프로이트는 격조 있는 문화 발전만이 파괴본능을 치유하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취지로 답장을 썼는데, 그 답은 여전히 유효하다. 얼마 전 푸틴의 영토 확장 야욕의 상징인 크름대교가 폭파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던 러시아는 전쟁물자 보급통로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눈에 보이는 다리보다 눈에 안 보이는 문화라는 다리 단절의 후유증은 두고두고 치명적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과 6·25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데다 문화의 다리마저 사실상 절단되었다. 여기서 문화는 당연히 한자와 서(書)라는 언어와 예술이다. 그 대신 영어와 유화 추상 같은 서구예술을 얻었지만 역사와 현대의 정신고속도로가 문화인 만큼 그 영향력은 크름대교 폭파와는 비교가 안 된다. 혹자는 지금 전 세계가 ‘한글홀릭’에 빠져 있는데 무슨 정신없는 소리를 하는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이다. 그 심연 모를 이면의 집단문화력을 통찰하고 실천해낼 때가 지금이다. 15세기에 이미 고금의 언어를 회통시켜 창조해낸 훈민정음 프로젝트가 지금 요청된다. 인류 차원의 언어예술의 한반도발 백년대계를 평화를 화두로 지금부터 실천해내지 못하면 한류는 유행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이웃나라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전(국립신미술관)과 게르하르트 리히터전(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우리 문화 대맥의 향방에 큰 각성을 준다. 전쟁의 산물인 추상이 동서의 예술을 어떻게 전복시켰고, 역사와 현대문명을 관통하는 전통의 다리가 왜 중요한지, 또 서화와 미술을 넘어 언어와 예술의 원점회귀는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두 사람의 실존 자체가 남북한, 동서독과 같이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동서미술의 두 거장이 벌이는 추상전쟁은 언어와 예술의 결정체인 서(書), 더 구체적으로는 점획(點劃)이라는 역사전통이 왜 기계시대 인간들에게 중요한지까지 보여준다. 이우환이 세계를 비워서 채운다면 리히터는 채우면서 비워낸다. 예컨대 이우환의 2022년 작 ‘대화(對話)’는 사방 10m가 넘는 흰 벽면 자체를 캔버스 삼아 아예 한 점(點)만을 찍고 있다. 점 하나를 캔버스에 던짐으로써 텅 빈 공간이 꽉 찬 에너지의 파동으로 넘쳐난다. 그래서 그림보다 근본이 먼저라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관점에서 주인은 점(點)이 아니라 여백이 된다.
하지만 리히터는 이우환과 정반대 행보의 기법을 보인다. ‘Abstract Painting’ 시리즈는 휘황찬란한 컬러에다 오일 브러시의 무한반복으로 화면을 겹겹으로 올오브페인팅 해낸다. 이내 나이프로 바닥을 다시 긁어내면서 주인인 여백을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만들어낸다. 무목적성의 목적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땅 파고 땅 덮기의 무한반복이다. 지금은 회화종말시대라 할 만큼 설치와 영상 실험이 난무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예술이 ‘그리기’와 ‘쓰기’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두 거장이 침묵으로 말하고 있고, 여백(餘白)으로 그림의 미래까지 제시한다.
여백은 세계의 숨구멍이다. 이우환의 여백이 오일로 점을 찍음으로써 본디 스스로 그러한 기(氣)가 드러나도록 한다면 리히터는 오일로 이러한 에너지를 필사적으로 경영해낸다. 전자가 문자가 가진 텍스트를 절단 해체시킴으로써 서(書)의 원점인 필획 본래의 그림으로 되돌린 경우라면, 후자는 여전히 그림 본연에 머물러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점획과 선면의 차이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계시대 무용지물이 된 서(書)의 대용(大用)의 무한경계를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오일이라는 물질덩어리는 비로소 정신으로 도약하고, 전통서화의 ‘필묵사의’(筆墨寫意)가 현대미술의 ‘유화사의’로 대전환된다. 급기야 물질과 정신의 불이 관계는 광기와 파괴본능의 치유에까지 필묵으로 희망하게 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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