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장충단을 영원히 훼손한 것은, 일제가 아닌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삼성이다

기자 2022. 10.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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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장충단비
1971년, 2021년 장충단공원 비석.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잘 알려진 장충단(奬忠壇)은 ‘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이란 뜻이다. 고종 32년(189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순국한 신하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광무 4년(1900년)에 고종 황제의 명으로 지어졌다. 장충단에는 본래 제단과 사전(祀殿), 부속건물 등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장충단’이라고 새긴 비석만 남아 있다. 사진에 선명한 장충단이라는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라 한다.

이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만든 것은 일제다. 일제는 1919년 이곳을 공원으로 지정하여 벚꽃을 심고 연못, 놀이터 등을 만들었으며 비석도 뽑아버렸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세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묘소와 사원이 있던 곳에 공원을 조성했는데, 그것이 도쿄의 우에노 공원이다. 이처럼 장소가 지닌 정기를 꺾기 위해서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1932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란 절을 이곳에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장충단을 영원히 훼손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와 삼성이다. 장충단비가 원래 있던 곳은 지금 신라호텔이 있는 곳이다. 장충단은 지금의 장충단공원보다 훨씬 넓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7년에 육군체육관(지금의 장충체육관)을, 1959년에 박문사 자리에 국빈 접대를 위한 영빈관을 짓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들어서는 자유센터, 타워호텔(지금의 반얀트리호텔), 국립극장, 재향군인회 등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영빈관은 삼성에 매각되고 영빈관 옆에 신라호텔이 지어졌다. 그 와중에 광복 이후 복원되었던 장충단비는 1969년에 지금의 수표교 서쪽으로 옮겨졌다. 장충단은 박문사로, 박문사는 신라호텔로 바뀐 것이다.

2021년 사진을 보면 장충단비 뒤에 1971년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 석등 두 개와 작은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에는 ‘제일강산태평세계(第一江山太平世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배성관이라는 유명 골동품상이 1963년에 개인적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 밀매꾼이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장충단비와 함께 있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장충단비는 1969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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