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청첩장
바야흐로 산에는 단풍, 산밑에는 결혼이다. 직원이 좀 쭈뼛거리는 눈치더니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런 경사스러운 문건은 두 손으로 받아야 하는 게 옳은데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쑥스러운 듯 돌아서는 10월의 신부께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어떤 모임에서 총무 역할을 하던 후배가 흐뭇한 소식을 보내왔다. 마흔이 다 되도록 짝을 찾지 못해 여러 회원들이 <총무장가보내기 대책위원회>를 결성할 정도였다. 하지만 술꾼들이란 술자리의 말을 그냥 술잔 옆에 흘리고 나오기 십상이다. 후배는 ‘총장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마련한 청첩장을 띄운 것이다. <故 000씨 故 000여사의 3남 00군>이라고 적혀 있었다. 비록 예식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예식 준비에 항상 함께했을 양친을 향한 신랑의 마음 씀씀이가 퍽 대견하고 인상적이었다.
30여년 전에 나도 청첩장을 만들었다. 교회주보를 주로 만드는 어느 인쇄소에서 주문했던 것 같다. 날씨 빼곤 모두 정했는데 마지막으로 초대의 글을 뭐로 할지가 고민이었다. 먼저 제작된 예문을 참고하였지만 현란하되 공허해서 선뜻 내키지 않았다. 문득 <문장강화>가 떠올랐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상허 이태준이 쓴 이 책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는 문장론의 고전이다. 무엇보다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예문들이 풍부해서 좋다. 책을 펼치니 과연 지은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하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좀 예스러워 현대적이지 않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주저없이 그 문장을 선택했다.
투덜투덜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벌린 채, 우리집에 단 한 장 남아 있는 그 청첩장에는 지금도 이렇게 적혀 있다. <어버이 가리신 바이요 서로 백년을 함께할 뜻이 서서 이제 여러 어른과 벗을 모신 앞에 화촉을 밝히겠사오니 부디 오시어 양가에 빛을 베푸시옵소서.> 결혼식은 짧고 결혼은 길다. 그 길 위에서 더러 간지러운 소동이야 없을 순 없겠다. 그때마다 수없이 뾰족한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저 문장의 꾸지람 앞에서 딱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보게, 백년을 채우려면 아직도 멀었다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사과해” “손가락질 말라” 고성·삿대질 난무한 대통령실 국정감사 [국회풍경]
- 수능 격려 도중 실신한 신경호 강원교육감…교육청·전교조 원인 놓고 공방
- [스경X이슈] ‘나는 솔로’ 23기 정숙, 하다하다 범죄전과자까지 출연…검증 하긴 하나?
- “이러다 다 죽어요” 외치는 이정재···예고편으로 엿본 ‘오겜’ 시즌2
- [단독] ‘김건희 일가 특혜 의혹’ 일었던 양평고속도로 용역 업체도 관급 공사 수주↑
- 유승민 “윤 대통령 부부, 국민 앞에 나와 잘못 참회하고 사과해야”
- “부끄럽고 참담” “또 녹취 튼다 한다”···‘대통령 육성’ 공개에 위기감 고조되는 여당
- 김용민 “임기 단축 개헌하면 내년 5월 끝···탄핵보다 더 빨라”
- [한국갤럽]윤 대통령, 역대 최저 19% 지지율…TK선 18% ‘지지층 붕괴’
- 민주당, 대통령 관저 ‘호화 스크린골프장’ 설치 의혹 제기… 경호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