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파견 투쟁’ 12년 만에 승소…제2 최병승들 “너무 늦은 정의”
“저렇게 쉽게 말 한 마디로 나올 수 있는 판결인데, 저희한테는 너무 길고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박찬진(41)씨는 2005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사내협력업체에 입사해 완성차 품질검사 업무를 했다. 원청인 기아차의 계획과 지시대로 일해왔지만, ‘기아차’ 노동자는 아니었다.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처우를 겪었고, 2010년 원청인 기아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냈다. 꼬박 12년 만인 27일 오전 박씨는 대법원에서 “기아차 정규직 노동자”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날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 6살 딸과 함께 나온 박씨는 “너무 당연한 말 한 마디인데, 12년을 기다렸다”며 “그동안 고소·고발도 당하고, 벌금도 받고, 손해배상 소송도 당하고 너무 힘든 과정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날 대법원은 현대·기아차 사내하청노동자 479명이 낸 소송 상고심에서 현대·기아차가 사내하도급으로 사용했던 도장·의장·생산관리·내수출고·수출방청 공정의 노동자들이 원청인 현대·기아차와 “노동자 파견 관계에 있다”며, 정년이 지난 노동자들과 2차 하청업체 노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현대·기아차가 직접고용하라고 판결했다.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노동자 파견이 허용되지 않는 제조업 생산공정 등에 노동자를 파견받아 사용할 경우 사용사업주(원청)에게 직접고용 의무를 부과한다.
이번 판결은 완성차 업체에서 사내하도급을 활용했던 대부분의 공정이 ‘불법파견’임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 판결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을 대리한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그동안 기업들은 컨베이벨트에서 일하는 직접생산 공정만 불법파견이 인정된다고 주장해왔는데, 이번 판결에선 차체 프레스부터 품질관리·생산관리 전반의 모든 공정을 망라해 불법파견이 인정됐다”며 “현대·기아차는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문제제기된 ‘현대·기아차 불법 파견’
완성차 공장의 불법파견 문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돼왔다. 원청의 지시를 받고 원청노동자와 똑같거나 유사한 업무를 하지만 임금과 처우는 훨씬 못미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불이 붙었다.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노동자 최병승씨가 2004년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낸 뒤, 2010년 대법원은 현대차의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하고, 최씨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임을 확인하면서 원청을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도 잇따라 제기됐다. 이날 대법원 판결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2010~2011년 소송을 제기한 이들이다.
이후에도 대법원이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의 불법파견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하급심에서 현대·기아차가 잇따라 패소했지만, 현대·기아차는 불법파견을 해소하지 않고 소송에서 이긴 노동자만 직접고용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차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인 하청노동자를 상대론 형사고소를 진행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 현대·기아차가 낸 손배소 28건의 청구액은 366억여원에 이른다. 불법파견 소송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정규직 노동자에 못미치는 처우로 사내하청 노동자를 ‘특별채용’하기도 했다. 회사는 특별채용에 응하는 노동자에겐 손배소를 취하해 줬는데, 노조 무력화 효과도 거둔 셈이다.
노동계에서는 고용노동부와 검찰도 현대·기아차의 불법파견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견법은 불법파견을 활용한 사용사업주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는 조항을 두고 있는데, 그동안 노동부와 검찰이 파견법 위반에 대해 소극적으로 수사해 불법파견 문제를 빨리 바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수사기관이 직접 수사해서 처벌했어야 하지만 미적대는 바람에 처벌이 이뤄지지 못했고 제대로 처벌이 됐다면 오늘 판결 전에 벌써 불법파견이 시정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 화성공장 사내하청노동자로 이번 소송의 원고이기도 했던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도 “더 이상 법원 문턱을 들락거리면서 내 지위가 정규직인지 확인해달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은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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