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트러스 여사, 낙담 마시라

기자 2022. 10. 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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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 영국 총리가 44일 만에 사임했다. 역대 최단기 재임이라고 한다. 메이, 존슨 같은 다른 총리들과 달리 이상하게 이름이 입에 안 붙다가 이제 좀 나아지려고 했는데 사임이라니 아쉽다. 본인의 심사야 오죽하겠는가.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은 1885년 내각제도를 도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제를 만들어 첫 총리에 올랐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일본 내각의 출발이다. 4년 후 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890년 의회가 개설됐다. 그러나 내각은 의회 다수당이 구성하는 게 아니라, 일왕이 임명한 총리가 조각했다. 내각은 의회가 아니라, 일왕에게 책임을 졌다. 정당내각제, 의원내각제는 아닌 것이다. 이 구조는 1945년 패전 때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됐다. 총리라 해도 내각 안에서 압도적 권력을 갖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원로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각 정파의 권력을 안배하여 조각해야만 했다. 내각에는 총리에 버금가는 거물들이 즐비했다. 독재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였다. 각 정파가 조각에 적극 협조하면 ‘드림팀’이 되고, 거물이 빠지면 ‘이류내각’이라고 조롱당했다.

일본 내각의 체질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원로의 권력이 약해지고 내각구성에 정당과 군부의 입김이 거세졌다. 정당 출신이 대신에도 임명되더니 마침내 1918년 정당에서 잔뼈가 굵은 하라 다카시(原敬)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된 당의 당수를 일왕이 총리로 임명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주지하듯, 이는 1930년대 대공황, 만주사변, 우익테러와 군부의 대두로 사라졌다. 군부의 정치개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열혈군인’이 집회에서 정치연설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육군대신, 해군대신은 현역군인 중에서 임명해야 한다는 규정(군부대신 현역무관제)을 악용하여, 군부는 신임 총리가 맘에 들지 않으면 육·해군대신 후보를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신내각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등 장성 출신이 총리가 되는 일은 군국주의 성립 이전에도 있었다. 정당과 군부의 각축 속에서 결국 1930년대 후반 이후 군부는 내각구성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정치의 격렬함이 덜한 나라지만, 총리는 역시 힘든 자리였다. 가토 다카아키, 가토 도모자부로, 오히라 마사요시, 오부치 게이조 등이 재임 중 병으로 사망했고, 하라 다카시와 이누카이 쓰요시는 암살당했다. 권력상실로 인한 충격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 러일전쟁과 한국 합병 때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桂太郞,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그 가쓰라다)는 1912년 말 세 번째로 총리가 되었으나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이 일어나(다이쇼정변), 취임 66일 만에 사임했다. 트러스보다는 22일 길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불명예다. 결국 사임 몇 달 만에 뇌혈전으로 죽었다. 1928년 관동군이 만주의 실력자 장작림(張作霖)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육군의 대부이자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관동군을 옹호하는 보고를 했다가 질책을 받았다. 총리에 대한 이례적인 일왕의 질책에 다나카는 사직했고 석 달 만에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이고 나면 그 상실감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30세에 권력을 잃은 뒤에도 사냥, 사진, 온천 등을 즐기며 76세까지 인생을 즐기다 갔다. 그의 정적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는 치열한 권력다툼을 하다 30여년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권력 말고도 이 세상에는 즐길 것이 많다. 트러스 여사도 너무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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