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성폭력 피해자 정의 회복엔 플랫폼업체의 결단과 책임이 필요

한겨레 2022. 10. 2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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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50주년 특별기고_③온라인 젠더기반폭력

[왜냐면] 양은선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인팀장

“디지털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네? 아직 어떤 캠페인인지 설명도 안 했는데….”

지난 8월 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방문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에서 수많은 여성과 문장 일부가 생략된 매우 짧은 대화를 나눴다. 10년 이상 단체에서 일하며 수많은 거리캠페인을 진행했지만, 캠페인 슬로건을 말하기도 전에 시민이 반응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었다. 일종의 ‘신비 체험’과도 같았는데, 많은 날엔 하루에 400명 가까운 이들이 우리 이야기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줬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영화제 관객들을 대상으로 ‘타임 투 스톱’(이제는 멈출 시간) 캠페인을 통해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유포 범죄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며, 피해자 정의 회복에 함께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스를 찾는 관객들 대부분은 10대와 20대 여성이었다. 긴 설명 없이도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계속 유사 사건이 있다고 전해주기도 했고, 유포로 인한 고통을 죽음에 비유하는 참여자도 있었다. 이들은 피해 생존자가 겪는 온라인상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그런 폭력을 실재하는 공포이자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활동가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부스로 다가와 캠페인에 참여한 이유였다.

앰네스티는 지난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젠더기반폭력에 노출돼온 밀레니얼 여성들이 응원과 연대를 하는 ‘자기 긍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기에 참여한 여성 1천여명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평등하고, 차별 없이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세상과 함께 자주 언급된 소망은 ‘안전한 세상’이었다. 이들의 바람은 영화제에서 만난 젊은 여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사는 여성으로, 늦은 밤 주위를 살피며 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나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여성으로, 여성들이 더는 무고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

나는 성차별에 반대하는 여성으로 성폭력과 성착취가 당연시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2020년 텔레그램 디지털 성착취 사건(n번방 사건) 이후 3년이 흘렀지만 생존자가 원하는 실질적인 정의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생존자 정의 회복의 기본 전제는 어딘가에서 돌아다닐 성착취물의 온전한 삭제에 있기 때문이다. ‘불법사이트 차단’과 ‘유포자 강력 처벌’뿐 아니라 무엇보다 피해 영상이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 손쉽게 피해물이 검색, 공유되고, 삭제된 영상조차 쉽게 되살아나는 한 피해 생존자의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서 국경은 무의미하다. 누구나 어디서든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몇번 클릭만으로 수십기가바이트 성착취물에 도달할 수 있다. 마음먹으면 몇분 안에 유포 범죄가 이뤄지는데, 가상화폐 거래로 가해자를 추적하기 어려워졌다. 온라인에서 일어난 범죄지만 생존자는 실제 삶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이런 인권 침해는 전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바탕한 온라인 젠더기반폭력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디지털 성폭력의 초국경성, 급속한 유포 속도, 피해의 영속성은 여러번 언급됐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앰네스티는 바로 이 점에 집중하고 있다. 수많은 생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데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누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는지, 누구의 어떤 행동 변화가 생존자들의 정의 회복에 가장 크고 빠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 질문해야 한다.

수많은 관련 단체와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전문적 수사와 법 집행, 피해물 삭제 지원을 포함하는 원스톱 피해자 지원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하지만 중요한 책임 주체 중 하나인 기업의 노력이 결합하지 않으면 정부 쪽 조치는 반쪽 성과에 그친다. 소셜미디어, 검색 엔진, 클라우드 서비스 등은 디지털 성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이자 도구다. 특정 사건에서 수사당국과 공조를 넘어 온라인 젠더기반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플랫폼 업체들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앰네스티에 자기 생각을 전한 수천의 여성들은 지금의 방법과 대응 속도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인권의 보장을 위해 각각 책임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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