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노년의 삶에 녹아든 친구 같은 기술이 '제론테크' 핵심"
20여 년간 제론테크 연구한 전문가
주거 환경과 맞닿은 기술 개발 강조
“노인과 기술의 문제를 고민한 연구자들의 국제 조직인 국제제론테크놀로지학회(ISG)를 올해 한국에서 연 이유요? 고령화 속도 때문이죠. 한국의 고령화는 학계가 주목할 정도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헬리안데 콜트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공대 교수는 이달 24일 대구 산격동 엑스코에서 개막한 ISG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노인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은 선진국들이 겪는 공통된 현상이지만 한국은 그 중에서도 노령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상징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최적의 학회 개최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ISG는 지난 1989년 아인트호벤 공대 연구자들이 노인학(gereology)에 기술(technology)을 융합해 노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제론테크놀로지(Gerontechnology)’라는 말도 노인학과 기술을 합친 단어다. 199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전 세계를 돌며 2년에 한 번씩 열었는데, 한국에서 개최하기는 처음이다.
콜트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ISG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에서 의학과 생물학 석사, 아인트호벤대 건축환경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지난 1997년 시작한 요양원 봉사활동을 계기로 제론테크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콜트 교수는 “요양원 시설, 기후 등 주변 환경이 노인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궁금해 시험 삼아 연구를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콜트 교수는 그 뒤로 현재까지 제론테크 분야에서만 60편 넘는 논문을 집필했다. 그는 “노인의 일상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기술이 이상적인 제론테크”라며 “그 핵심에 인공지능(AI)이 있다”고 말했다. 제품을 집이나 병실 등에 설치만 해도 알아서 노인들 상태를 파악해 지속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대구 엑스코 1층에서 ISG와 공동 개최된 ‘액티브 시니어 박람회’에서는 제론테크의 ‘대세’가 이제 AI임을 실감했다. 이 박람회에 참여한 220개 기업들 중 대부분은 콜트 교수 말처럼 AI를 적용한 제품을 선보였다. 독거노인 말동무 역할을 해주는 AI 인형, 노인의 낙상과 욕창을 감지하는 침대용 AI 센서 같은 다양한 제품이 눈길을 끌었다.
고령화 사회가 가시화하면서 대기업들도 제론테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에 네이버가 부스를 만들어 AI가 전화로 노인과 대화하며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클로바케어콜’ 서비스를 공개했다.
콜트 교수는 AI를 기반으로 한 제론테크와 헬스케어 산업은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평가했다. 노인 건강 상태를 병원이 아닌 집에서 빠르게 진단하는 기술이 나와야 이 분야의 ‘퀀텀 점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콜트 교수와 일문일답.
- 전 세계를 돌며 개최하던 ISG가 올해에는 한국에서 열렸다. 이유가 있나.
“가장 큰 이유는 고령화 속도였다. 고령층이 워낙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탓에 한국은 여러모로 학계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 2045년에 일본 고령화율을 한국이 추월한다는 한국 정부 자료도 봤다. 아시아 선진국들 중 고령화 문제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제론테크는 물론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전반에 대한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을 개최지로 결정했다.”
- 액티브 시니어 박람회와 개최 시기를 맞춘 것도 그런 이유인가.
“그렇다. ISG는 강연 중심의 학회고, 액티브 시니어 박람회는 기업들이 제론테크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강연을 통해 제론테크 분야의 기술적 트렌드를 확인하고, 박람회에서 그 기술들이 적용된 제품을 체험해볼 수 있다. 두 행사가 좋은 시너지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 기술적 트렌드를 이야기 했는데, 그렇다면 제론테크 분야의 ‘대세’ 기술은 뭔가.
“AI다. AI는 이제 트렌드보다는 ‘기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다. 물리적으로 어르신들 거동을 편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닌 이상 AI는 사실상 모든 제론테크 제품에 들어가게 될 거다.”
- AI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노인들의 평소 일상생활 패턴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AI만큼 유용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AI 비서 ‘자비스’를 떠올리면 된다. 인간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기술이 인간에게 알아서 맞춰준다. 젊은 사람은 새로운 기술에 자신을 맞출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게 힘들다. 때문에 제론테크는 로켓이나 반도체처럼 기술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좋은 게 아니다. 노인도 쉽게 쓸 수 있거나, 단순히 전원만 넣으면 모든 기능을 알아서 수행하는 식이 돼야 한다. 그런 식으로 노인들 일상에 아무 위화감 없이 스며들어야 한다.”
- 그런 기술의 사례가 있나.
“액티브 시니어 박람회를 보면 된다. 인간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AI 인형을 집에 두거나, 침대에 낙상과 욕창을 감지할 수 있는 AI 센서를 다는 식이다. AI 인형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냥 말을 걸면 된다. 침대에 다는 AI 센서는 전원만 넣으면 알아서 작동한다. 기술을 쓰려고 뭔가를 새로 배우거나 사용 방법을 외울 필요가 없다.”
- 그렇다면 곧 AI 비서 ‘자비스’가 현실화되는 건가.
“그건 아직 멀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 나오는 기술들도 수준이 높지만, 도착점을 ‘자비스’에 둔다면 아직 걸음마 단계다. 가장 핵심은 AI가 노인 건강 및 질병 상태를 병원이 아닌 집이나 요양원처럼 노인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정확도로 측정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퀀텀 점프가 가능하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 제론테크를 ‘사는 곳’에 적용하는 걸 강조하는 것 같은데, 전공인 건축환경 분야와 관련이 있나.
“물론이다. 노인은 생활 반경이 좁고 야외 활동이 젊은 연령대에 비해 비교적 덜 활발하다. 때문에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시스템을 설치한다면, 당연히 사는 곳이 돼야 한다. 또한 몸이 불편한 노인이 거주지에서 원활한 생활을 하려면 집이나 요양원의 구조도 그에 맞게 설계가 돼야 한다. 계단과 벽, 문턱을 최소화하는 건 물론 싱크대 높이를 조절하는 등 물리적인 장치도 AI 만큼 중요하다.”
- 논문을 많이 쓰셨는데 그것들도 대부분 건강과 주거환경을 연관짓는 내용인가.
“그렇다. 치매 환자가 살 공간은 어떤 식으로 설계돼야 하는지, 집과 요양시설의 환기 수준이 노인들 수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연구했다. 조명 밝기, 주변 소음 수준, 공기 질 등 정말 많은 것들이 노인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 제론테크 분야에서 글로벌 탑급 기업은 어디가 있나.
“생각나는 기업이 몇 군데 있지만 학회장 신분에 특정 기업을 콕 집어 얘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에서 치고나가는 기업이 제론테크 분야에서도 강세를 보일 거다. 둘 다 AI가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 세계 제론테크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이 성장할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높다고 본다. 암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제론테크 산업에서 성장하는 게 한국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저출산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 노인이 늘어난다는 건 제론테크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주요 고객층이 두터워진다는 얘기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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