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밤낮 고문에도 스물다섯 살 '용의자'는 무엇을 자백할지 몰랐다[그 시대, 유죄추정의 원칙]

이홍근·전지현 기자 2022. 10. 25.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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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 범인 몰린 이상출씨
‘형사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헌법 제27조 4항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 명기돼 근대 인권법의 기본 원칙이 됐다.
이 원칙에 입각해 모든 시민은 적법 절차에 따라 수사를 받고, 재판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군부독재 아래 검찰과 경찰은 용의자를 죄인처럼 다뤘다. 엉뚱한 사람을 잡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고, 혐의를 증명하지 못하면 다른 혐의를 씌워 가뒀다.
몸이 망가졌고 정신이 피폐해졌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삶이 송두리째 무너진 채 집으로 돌아갔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마음껏 몽둥이를 휘둘렀던 수사관들은 수사기관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상처는 과거의 시간과 함께 그대로 박제돼 있다. 경향신문은 그 시대, 유죄추정의 원칙에 갇혀 검경의 강압수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사연을 연재한다.
양태가 다르고 정도는 덜할지라도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공권력의 오남용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1회는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한쪽 눈을 잃은 이상출씨 이야기다.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 용의자로 불법 체포돼 고문을 당한 피해자 이상출씨의 안경에 그의 20대 시절 사진이 비치고 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사라진 이군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여관방에 가둔 채 고문한 경찰은
허위자백에도 구속 어렵게 되자
“너 때문에 고생한다”며 눈 찔러

4박5일 동안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언제 죽였냐.” “흉기는 어디 있냐.”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냐.”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할 수 없었다. 누런 여관방 벽지 너머로 형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번 태우자.” 머리채를 잡힌 채 화장실로 끌려갔다. 욕조에서는 펄펄 끓는 물이 수증기를 뿜고 있었다. 없는 죄라도 지어내 자백하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입을 떼려는 순간 얼굴이 욕조에 처박혔다.

이상출씨(66)는 매일 밤 1981년 스산했던 여관방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스물다섯이던 그는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의 A급 용의자로 지목돼 그해 9월4일부터 5일간 밤낮으로 고문당했다. 진범은 중학교 체육교사 주영형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자 경찰은 애먼 이씨를 범인으로 몰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지금은 남은 왼쪽 눈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이씨는 그날을 잊기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섯 알의 알약을 털어넣는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자꾸 이씨를 그날의 여관방으로 데려간다.

이씨는 지난 6월22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9월26일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씨는 지난 10일 경기 성남시에 있는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두 눈이 다 멀기 전에 내 눈을 이렇게 만든 형사를 찾아내고 싶다”며 “내가 죄가 없는 걸 알면서도 눈을 찌른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출씨의 무죄 판결을 다룬 1982년 11월10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1981년 9월4일 이씨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성 두 명이 그에게 말했다. “부동산인데 집 좀 보러 왔습니다.” 이씨는 집을 매물로 내놓은 적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남성들은 문지방에 발을 얹자마자 말을 바꿨다. “경찰입니다. 조사할 게 있습니다. 협조하시죠.”

경찰은 무엇을 조사하는지, 왜 찾아왔는지 밝히지 않았다. 집에 들이닥쳐 이씨의 사진첩과 졸업 앨범을 뒤적일 뿐이었다. 수색을 마친 경찰은 “2시간이면 된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이씨는 “죄를 저지르고 산 적이 없어 경찰 수사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 알았다”고 했다. 이씨는 놀란 아내와 자식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경찰이 이씨를 데려간 곳은 관할인 서울 마포경찰서가 아닌 기찻길 옆에 위치한 여관 3층이었다. 침대 앞 좌식 책상에 앉은 형사는 어리둥절해하는 이씨에게 낯선 이름을 들이밀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씨는 “비슷한 이름의 동창은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찰이 팔을 뒤로 꺾고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이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윤상군 아버지 이름이었다”고 했다. 경찰은 그가 모른다고 할 때마다 수갑을 눌러 손목을 고통스럽게 했다. 첫날 밤늦게까지 이어진 취조는 경찰이 이씨의 수갑을 침대 틀에 묶어놓고 자리를 떠난 후에야 끝이 났다.

이씨는 자신이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 용의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체 무엇을 자백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답 없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이씨의 몸과 마음은 점점 망가졌다.

9월5일 점심 한 형사는 이씨 앞에 짬뽕 한 그릇을 내놨다. 여관방에 잡혀온 지 이틀 만에 처음 마주하는 음식이었다. “국물은 먹지 말라”는 형사의 당부를 지켰다. 이씨는 짬뽕 면과 건더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비웠다. 마주 앉은 형사는 짬뽕 그릇을 응시했다. 이내 이씨에게 “이윤상군을 어디에 숨겼냐”고 물었다. TV로만 보던 희대의 유괴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됐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이씨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씨가 대국민 담화를 하는 것을 보고 이윤상군 사건을 알고 있었다”며 “나를 범인으로 생각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이씨를 A급 용의자로 꼽은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로부터 10여년 전 이씨가 살던 마포구 공덕동 집이 이군의 옆집이었기 때문이다. 이사 전 이씨가 살았던 집 뒷문과 이군의 집 마당이 바로 붙어 있었다. 이씨가 정육점에서 일하는 것도 경찰이 용의자로 추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경찰은 이씨가 소 운반용 냉동트럭을 이용해 이군을 유괴한 뒤 도축하듯 해체해 시신을 유기했다고 의심했다.

진범이 이군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할 때 전화 너머로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이씨가 강아지를 키운 것도 범행 증거라고 봤다. 이씨의 집에서 사진첩과 졸업 앨범을 가져간 이유도 있었다. 진범은 여고생들을 이용해 협박 전화를 했는데, 경찰은 사진첩 속 여성들 중에 이씨의 공범이 있다고 추정했다.

당연히 이씨는 아무것도 몰랐다. 경찰은 “왜 유괴했냐” “시신을 어디에 뒀냐” “이군의 아버지 돈을 노린 것 아니냐”고 캐물었다. 이씨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허기를 채운 짬뽕이 고문 도구로 돌변했다. 경찰은 이씨의 목을 젖혀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짬뽕 국물을 그 위에 부었다. 이씨는 이후에도 세 끼의 짬뽕을 더 먹어야 했다.

수일간 계속된 신문에도 이씨가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고문 강도가 더 세졌다. 앰뷸런스를 대기시키라는 형사의 말과 함께 이씨는 화장실로 끌려갔다. “너는 앞으로 머리털을 보기 힘들 거다.” 경찰은 뜨거운 물에 이씨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처음 겪는 육체적 고통에 이씨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뒤 이씨는 “이윤상군을 내가 죽였다”고 허위로 자백했다. 경찰이 제시한 시나리오대로 이군을 납치한 뒤 시신을 분쇄해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자백하고 나니 그제서야 고문 빈도가 줄어들었다”며 “뜨거운 물로 고문을 당한 뒤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의 자백만으로 범인을 검거했다고 밝힐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흉기도, 증인도, 시신도 없었다. 이씨의 집, 차, 정육점 어디에서도 이군의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벽 너머 옆방에서 형사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이씨를 수사하던 경찰 특별수사본부 1반 소속 7명 중에는 이씨와 평소 알고 지낸 형사도 있었다. 그는 “이씨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서부경찰서에서 파견나온 형사 A씨가 “이씨가 진범”이라며 맞섰다. 언쟁이 끝난 뒤 A씨는 “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며 이씨의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번쩍하는 고통과 함께 이씨는 영영 시력을 잃게 됐다.

경찰은 이씨를 유괴 살인 대신 공갈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군을 유괴하거나 살인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씨를 쉽게 풀어줄 수는 없었다. 불법 고문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씨의 금전 거래내역을 샅샅이 뒤졌다. 수사 과정에서 이씨가 같은 일을 하는 업자 B씨로부터 470만원을 받은 내역이 나왔다. 경찰은 이씨가 B씨가 운영하는 업체의 탈세를 고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받았다고 꾸며 같은 달 9일 이씨를 구속했다.

여관방에서 마포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진 이씨는 억울함보다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한쪽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이 컸다. 밤에는 눈을 붙일 수 있었고, 식사 때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 용의자로 불법 체포돼 고문을 당한 이상출씨가 평소 복용하는 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빈 기자
법정서 무죄는 밝혀졌지만
매일 밤 고문 트라우마 시달리며
이씨의 삶은 40년 전에 멈춰
“날 이렇게 만든 형사 찾고 싶다”

법정에서 이씨는 누명을 벗었다. 경찰이 조작한 공갈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1심 재판부는 1981년 12월1일 “증거가 없다”며 이씨를 풀어줬다.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의 진범 주영형과 공범 여고생 2명이 검거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씨는 “진범이 잡히기 전까지 재판이 계속 연기됐다”며 “변호사를 통해 진범이 잡혔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고 했다.

2심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법원은 “피고인의 경찰 자백은 임의성이 없으며 검찰 자백도 임의성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의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씨가 이윤상군 유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여관에 구금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철야 조사를 받은 사실도 인정했다.

법원이 이씨의 무죄를 인정했지만 그의 삶을 이전으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100일 넘게 형무소에 구금된 바람에 그가 운영하던 축산 사업은 망가져버렸다. 사건 전에 거래하던 업체들도 모두 연락이 끊겼다. 재기를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이씨가 의지할 데라고는 매일 마시는 5병의 소주와 만화책뿐이었다. 가족의 안위를 들먹이며 고문 피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경찰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생각도 못했다.

1년간의 방황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자동차 영업사원을 하던 친구가 “폐인처럼 살지 말고 일을 해보라”며 다른 정육점 일자리를 소개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40여년간 동종 업계에 투신하고 있다.

지난 10일 이상출씨가 경기 성남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20대 때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한수빈 기자

이씨가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것은 하나 남은 왼쪽 눈의 시력마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눈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요즘 들어 고문 후유증이 이전보다 심해졌다. 이씨의 아내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잘 때 소리를 지르며 벌떡 깬다”며 “젊을 때 당한 트라우마가 도저히 치료가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중추신경억제제, 알코올의존성 치료제, 우울증 치료제, 공황장애 치료제 등 알약 5개를 삼켜야만 겨우 잠들 수 있다.

이씨는 “나 말고도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잡혀가 고문당한 사람들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 동네 세탁소 아저씨는 아예 장애인이 됐다고 들었다”며 “당시 수사를 진행한 형사들의 사과를 받고 싶다. 특히 내 눈을 이렇게 만든 A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홍근·전지현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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