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둘 다 별로" "그래도 룰라"..브라질 민심 정책·쟁점별로 제각각
(상파울루=뉴스1) 최서윤 기자 = 좌우 이념 지형이 극명하게 갈리는 전·현직 간 대결로 주목받는 브라질 대선 결선 투표가 6일 앞으로 다가온 24일(현지시간) 상파울루에서 만난 시민들은 수치로 나타난 팽팽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반응을 보였다.
전반적으로 최선보다는 차악의 후보를 고른다는 입장이 많았고, 특정 후보를 뽑기로 마음 먹었더라도 기대가 크지 않다는 식이었다.
이번 대선은 지난 2일 치러진 1차 투표와 그간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역대 가장 양극화된 선거로 평가받는다. 지난 2일 실시된 1차 투표에선 룰라 전 대통령이 48.4%,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43.2% 각 득표하면서 초박빙을 보이며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말 한끗차이로 투표 당일 갑자기 한쪽을 찍은 부동층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후보는 모두 좌우 의견은 이미 갈렸다고 보고 1차 때 투표에 불참한 3230만여 명의 유권자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1차 때 받은 표가 그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어려워 보인다.
1차 투표 때 드러난 '샤이 보우소나루'의 뒷심이 더 강력하게 발휘될지, 선거 전 마지막 주말 터진 보우소나루의 측근 호베르투 제페르손(69) 전 하원의원의 경찰 공격 사건이 악재로 작용해 룰라에 압승을 가져다줄지 예측이 쉽지 않은 이유다.
◇"둘 다 별로…누구 고를지 모르겠다"
한국의 테헤란로와도 비슷해 보이는 상파울루의 번화가 파울리스타대로는 월요일인 이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날은 결선 전 여론조사 공표 마지막일이기도 하다. 바쁜 상파울루 사람들은 마음을 정했을까.
두 명의 30~40대 여성은 무관심하다는 듯 "누가 돼도 똑같다"고 말했고, 대로 노점에서 신문과 잡지를 파는 29세 남성은 같은 의견을 낸 뒤 "둘 다 양 극단에 있는 후보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연령대가 좀 더 높아지면 어떤 의견일까. 지하철을 기다리던 이네스 마페이(83)는 "50년째 뉴욕에 살고 있지만 투표권이 있고 가족들도 브라질에 살고 있어서 나라가 돌아가는 일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는 누굴 뽑을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한 명은 '뭐 할지 모르는 놈(보우소나루)'이고, 다른 한 명은 '감옥살이까지 한 부패한 놈(룰라)'"이라며 웃어 보였다.
룰라 전 대통령은 남미 최대 건설사 '오데브레시 스캔들'에 휘말려 수뢰 혐의로 2018년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지만 지난해 대법원에서 형이 취소됐다. 다만 취소 사유는 무죄라서가 아닌, 재판 절차상 오류 및 누락 때문이라고 대법원이 밝히면서 그의 수뢰 '진실'은 모호하게 남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룰라의 스캔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시민들이 많았다. 다만 각론은 좀더 다양했다. 룰라가 대법원에 돈을 주고 취소 판결을 산 것이라고 믿는다는 중년 여성도 있었고, 뇌물을 받은 건 진실이지만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에도 실형을 준 보우소나루의 검찰·사법 당국이 더 큰 문제라는 청년 남성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그래도 룰라"
상파울루 가톨릭대 교정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완전히 끝난 듯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즐겁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대학생들은 전반적으로 "그래도 룰라"라는 의견 일색이었다.
역사를 전공 중인 에릭 파울로(18)는 "룰라가 좋다기보다는 보우소나루가 싫어서 룰라를 뽑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는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유행 때 방역정책에 손을 놓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 실망스러웠다"며 "또 군에 우호적이면서 폭력을 선동하는 태도도 싫다"고 말했다.
브라질의 '미래 외교관'이 될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남학생 3명과 여학생 2명이 화기애애하게 수다 떨고 있던 국제관계학과방 문을 두드려봤다. 이번 대선에 뽑고 싶은 후보가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마자 하나같이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얼굴 옆으로 들어 '엘(L)'자를 그리며 웃는 학생들 뒤로 과방 안쪽에 붙은 룰라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베르나르두 무시(19)는 "룰라를 뽑겠지만 그를 완전히 지지하는 건 아니다"면서 "난 좌파인데 룰라는 실용좌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 방면에서 국유화 비율을 늘리는 등 보다 좌파적인 정책을 원하는데, 룰라는 선거에 이기려면 중도 표심을 잡을 필요도 있고 당선하더라도 포용을 위해 중도적인 정책을 많이 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룰라는 1기 정부 시작 당시 통화정책을 책임질 중앙은행 총재에 역량 있는 보수 인사를 앉히고 고금리를 통한 물가와 환율 안정을 이끌어낸 전력이 있다. 당시 재정정책은 안정을 위해 긴축을 택해 조화를 맞췄다. 그 밖에 우호적인 투자환경 조성 등 성장에 매진, 경제 정책은 중도와 보수를 오가는 선택을 하며 '실용' 좌파 인상을 남겼다.
흥미로운 정책 제안도 나왔다. 룰라가 택하지 않은 '보다 진보적인 정책'으로 마리화나(대마) 합법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아나 플라비아 데 올리베이라(20)는 마리화나 합법화가 사회적으로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마리화나 사용과 처벌이 이미 사회 계층을 고착화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솔직히 모두가 피우는데, 처벌에는 유전무죄가 적용돼 사회적 계층이 높고 돈 있는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계층 낮고 돈 없는 사람만 처벌받는다"는 설명이다. 근본적으론 법 집행 당국에 대한 불신으로도 읽혔다.
◇거리에는 흔치 않은 '샤이 보우소나루'…번화가 거리에 즐비한 텐트는?
이날 거리에서 '내가 보우소나루 지지자다'라고 답하는 시민을 만나긴 어려웠다. 그러나 1차 투표 때 48.4%(룰라) 대 43.2%(보우소나루)로 팽팽하게 나타난 표심은 '숨은 보우소나루 지지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아르헨티나 국적의 한 80대 여성은 "내가 투표권이 있다면 보우소나루를 뽑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로는 전통적인 가족관을 들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결혼해 자녀를 갖는 가족 구성을 보우소나루는 지지하고, 룰라는 반대하기 때문에 보우소나루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또 "낙태도 보우소나루는 반대하고 룰라는 찬성하지 않느냐"면서 "게다가 보우소나루는 모태 신앙이 기독교이고, 부인도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라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룰라 전 대통령이 내건 낙태 합법화는 실제로 여성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쟁점인 듯했다. 한 중년 여성은 "낙태는 여성에게 필요하지만, 그 여성들도 다수가 크리스천(기독교인)이라는 게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다 직업이 경비라고 밝힌 엔히케(32)는 '혹시 대선에 지지하는 후보가 있느냐'는 질문에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룰라를 지지한다"고 단번에 답했다. 그는 "(브라질이 현재) 빈부격차가 심한데, 룰라는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 삶 나아지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며 "보우소나루는 돈 없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고 말했다.
엔히케의 말을 듣고 둘러보니 우연찮게도 10년 만에 다시 찾은 파울리스타대로에는 전보다 더 많은 노숙인이 거의 1m 간격으로 보일 만큼 많아진 것 같았다. 코로나 영향 때문일까. 노숙자용 텐트도 즐비했다.
이날 아침 방송에서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2기 정부가 들어설 경우 민주주의 훼손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보도됐고, 한편에서는 이처럼 시민들이 각기 다른 잣대로 후보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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