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국회 시정연설에 야당이 추가조건 붙인 적은 헌정사상 없다?
2004년 이해찬 총리 연설때 한나라당 사과 요구..2019년 자유한국당도 국회정상화 두고 협상
대통령 시정연설 현장서 '상복 시위·침묵 시위·피케팅' 사례도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이아미 인턴기자 =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에서 "시정연설에 대해 추가 조건을 붙인다는 것은 헌정사에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25일 정부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시정연설을 앞두고 민주당이 보이콧(참석 거부)까지 시사하며 '대장동 특별검사 수용'과 '야당 탄압 사과'를 요구한 데 대한 발언이다.
야당의 요구를 우회적으로 거부한 셈이다. 민주당은 사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25일 시정연설에 전면 불참했다.
실제로 야당이 조건을 내걸고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보이콧한 사례는 헌정사상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시정연설을 앞두고 야당이 조건을 내걸며 시정연설 참석을 거부했던 것이 처음은 아니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연설문 데이터베이스 등을 보면, 2004년 10월 당시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 때,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이 총리가 유럽 방문 중 야당을 폄하하고 특정 신문을 비판한 것과 관련과 관련해 "사과하지 않을 경우 이 총리가 대독하는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을 듣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총리는 앞서 베를린 기자 간담회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는 퇴보한다", "한나라당 나쁜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조선·동아일보는 내 손아귀에서 논다" 같은 발언을 했고, 이에 한나라당은 총리 사과를 요구하며 시정연설 참석을 거부를 시사한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일단 본회의장에는 입장했지만 이 총리가 사과하지 않자 결국 속속 퇴장하는 방식으로 연설을 보이콧했다.
시정연설은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때까지는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게 관행이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은 4년 연속, 문재인 전 대통령은 5년 연속으로 정부 본예산안과 관련해 시정연설을 직접 했다.
시정연설 참석 여부가 명시적 협상 대상은 아니었지만 이를 포함한 국회 정상화를 놓고 여야가 협상에 나섰다가 결국 야당의 불참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019년 6월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한 이낙연 국무총리의 시정연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시정연설 청취를 포함한 '국회 정상화'의 조건으로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철회, 경제 청문회 개최 등을 내걸었다.
이후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야 교섭단체 3당의 원내대표들이 비공개 회동에서 국회 정상화에 합의하고 시정연설을 듣기로 했지만, 이후 한국당 의총에서 제동이 걸렸다. 한국당 의원들은 패스트트랙 관련 합의안 조항의 구속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문제 삼아 강하게 반발해 결국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여야 간 첨예한 대립으로 시정연설을 하는 국회 본회의장이 시위나 항의 현장으로 변한 경우로 범위를 확장하면 전례는 더 많다. 야당이 시정연설이 열리는 본회의에 참석은 했지만 반대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식이었다.
가장 최근인 2021년 10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 때 국민의힘 의원들은 본회의에 참석했으나 '대장동 특검' 손팻말을 들고 침묵시위를 한 바 있다. 국민의힘은 이전 해인 2020년 10월에도 문 대통령이 국회 본관으로 들어올 때 '국민의 요구 특검법 당장 수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연설 중에도 야유와 항의를 보냈다.
2019년 10월에는 한국당 의원들이 손으로 'X'(엑스)자를 만들어 반대 뜻을 표출하거나, 손으로 귀를 막는 행동으로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또 2017년 11월에는 한국당이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보궐이사 선임에 반발해 국회 본회의장에 '상복 차림'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 때는 야당이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반대해 모니터 뒤에 인쇄물을 붙이는 등 침묵시위를 벌여 연설이 15분 지연된 바 있다. 2009년 11월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대독한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정연설에서는 군소정당이었던 선진당 의원들이 집단 퇴장해 시정연설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 밖에 시정연설은 정상적으로 이뤄졌지만, 연설 뒤 소란이 빚어진 경우도 있다. 2013년 11월 박 전 대통령 시정연설 때 야당은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시정연설은 얌전히 들었지만 이후 연설 내용에 불만이 있다며 국회 본관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청와대 경호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종합해보면, 야당이 조건을 제시했다가 수용되지 않자 시정연설에 불참한 사례는 2건, 그 밖에 시정연설 현장에서 시위의 형태로 거부 의사를 내비친 것은 최소 6건으로 보인다.
이번에 검토한 자료는 2004년 이후 것만 집계돼 있지만, 시정연설이 노태우 전 대통령 때 시작한 것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도 시정연설을 놓고 여야가 갈등을 빚은 사례는 더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야당이 시정연설을 보이콧하는 행위는 위법에 해당할까?
국회법 84조는 "예산안과 결산은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하고, 소관 상임위원회는 예비심사를 해 그 결과를 의장에게 보고한다. 이 경우 예산안에 대해서는 본회의에서 정부의 시정연설을 듣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구상으로는 국회가 예산안을 심의·의결하는 기관이기에 예산안을 신청한 정부의 의견을 듣고 판단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시정연설 자체는 예산 심의 절차상 필수과정이 맞다"라면서도 "해당 조항은 국회 의사절차에 관한 규정으로서 개별 의원들에게 의무가 발생하는지는 사무처에서 판단하기 어렵다"며 의무조항인지에 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을 지낸 노희범 변호사는 "(법상) 최소한 국회가 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는 있지만 절차가 생략되거나 파행된다고 해서 벌칙조항이 있는 것도, 예산안 심의를 못 하는 것도 아니다"라며 의무조항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meteor30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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