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혼자 죽는 건 불행한 죽음일까

한겨레 2022. 10. 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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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6)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도발적 주장 뒤에 있는 것들
구스타브 클림트의 ‘임종을 맞은 노인’(1899). 출처: 벨베데레미술관

한때 어르신들의 건배사가 ‘9988234’였던 적이 있다. 99살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만에 죽는(4) 것이라는 의미로 기억한다. 꽤 오래 전에 부모님과 식사 자리에서 이 표현을 들었던 나는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살 만큼 살다가, 쇠약해지지도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죽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표현에 별다른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표현은 크게 잘못되었다. 어제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나와 식사하고 통화하던 어르신이 오늘 돌아가셨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아, 그분은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아니, 어제까지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오늘 돌아가셨다고? 하며 놀랄 것이다. 또는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며 사망 소식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소식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힐 것이다. 혹시 내가 전일 식사하면서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닌지 고민할 것이고, 만났을 때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연이 닿아 이렇게 지내온 것이 영광이었다고 말하지 못한 것에 자책할 것이다. 9988234라는 소망은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죽음을 기대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결코 좋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쇠약을 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 마지막에는 휙 가고 싶은 걸 왜 탓하느냐고 타박하실지도 모르겠다. 늘그막의 편한 삶,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맞으며 나 또한 여기에서 마지막의 고통쯤은 당연하므로 감내하시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마지막의 편안함을 누릴 수 없는 우리 사회다. 9988234를 바라게 만드는 우리 제도다. 왜 며칠도 안 되어 순식간에 죽기를 바라야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생의 마지막이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인의 생은 무가치하며, 무가치한 삶은 배제되고 지워져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환자의 생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무시당해도 된다는 생각과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노인의 존엄사나 안락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나는 이전부터 생각해 왔다. 자기 생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인이 안락사를 택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안락사는 노인의 생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사회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왜 우리는 그냥 있음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가. 꼭 경제적 역할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그 삶은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 고민은 늘 벽에 가로막혀 왔다. 당장 내 삶을 보아도, 제때 점심 챙겨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삶이다. 자녀 또한 이런 삶을 살 거라면, 내 자녀에게 삶의 마지막을 부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무엇이 남는가? 병원? 시설? 안타깝지만 내가 거동이 불가능해지거나 중증 치매에 걸려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둘 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남은 대안이 없으니 어떻게 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사회학자, 여성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의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는 이런 나의 오랜 고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제목만 보아선 요새 회자하는 고독사, 혼자서 쓸쓸한 죽음을 맞고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발견되는 슬픈 사건들을 긍정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책에서 지즈코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더 행복한 방식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자는 것이다. 어떤 마지막이고 어떤 제도일까.

우에노 지즈코는 이론사회학과 페미니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로서, 최근 혼자 맞는 노후에 관한 여러 저작을 펴내어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6년에 번역된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서 이미 탐색했던 홀로 맞는 재택사의 문제를, 이번 책에서 지즈코는 논조를 유지하되 더 간명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출처: 알라딘

‘집에서 죽기’를 권하는 이유

먼저 지즈코가 왜 홀로 죽기를 권하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그는 결코 노인이 주변에 폐를 끼치므로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사는 노인이 행복하다고 지즈코는 목소리를 높인다.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첫째 오랫동안 거주해 온 자기 집에서 살 것. 둘째 혼자 살되 주변과 많은 관계 속에서 지낼 것. 당장 우리 사회를 투영했을 때, 두 조건은 우리에게 넌지시 말한다. 노년의 생에 가족은 부담이다.

가족은 매우 중요한 삶의 기초이자 구성 요소로써, 다른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되뇌며 살아온 우리에게 이런 주장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인지, 지즈코는 책의 첫 부분에서 다른 책의 설문 자료를 인용하면서 1인 가구의 노인이 2인 이상 가구의 노인보다 행복하고, 부담이나 걱정이 적으며, 심지어 고독함도 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가 제시한 수치로 보면, 사실 1인 가구가 다른 가구 형태보다 훨씬 더 행복하거나 부담이 적다고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즈코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틀렸다는 것, 노인이 혼자서 사는 것이 나쁘기는커녕 가족과 함께 사는 것과 비슷하거나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혼자 살면, 마지막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지즈코가 권하는 것은 ‘재택사’다. 그가 만든 신조어인 재택사는 표현 그대로 집에서 죽는 것이다. 병원에서 죽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진 현대 사회에선 집에서 죽는 것을 오히려 힘주어 표현할 필요가 있기에 새로운 단어를 요구한다. 당장 나도 그렇지만, 많은 분이 집에서 죽는 것을 바라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집에서 죽는 것이 가능한가?

이를 위해선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 생의 마지막에 병원에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하려는 고통을 피하기. 둘째 생의 마지막에 작별하려 하지 않고, 미리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인사를 해 두기. 셋째 재택간호와 재택의료 서비스를 받으며 의료인과 함께 집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을 준비하기.

현재 국내에서도 재택의료 시범사업이 여러 질환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말 그대로 시범사업이며, 서비스는 단편적이고 원하는 사람이 모두 혜택을 누리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

홀로 맞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법

이미 존엄사 또는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논의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사회이지만, 한편으론 잠들어 가는 생명을 억지로 늘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한쪽에선 향후 심폐소생술을 포함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서로에게 고통일 뿐임을 알면서도 이제 쉬려는 몸을 억지로 붙든다. 지즈코는 이것이 이율배반적이며 노년기에 당연히 찾아오는 ‘노쇠(frailty)’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일본에서 개념이 정립되어 최근 의학계의 화두 중 하나인 노쇠는 노년기의 급격한 신체적, 정신적 저하와 그로 인한 대응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노년기에 몸이 나빠지고 여러 장애를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기술로 억지스럽게 늦추려고 해봐야 당장 노인 본인에게 극심한 고통이 초래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노쇠를 수용하는 것, 노쇠를 겪는 노인이 생활에 다른 장애가 없도록 사회 환경이 정비되는 것이다. 서비스와 생활 환경 이용에 불편이 없는 것, 배리어프리 사회다. 장애인 단체가 오랫동안 요구하고 있는 이것은 당장 우리가 모두 처할 나이듦에 있어 필수 요소다.

다음,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주변 사람과 작별하는 것을 하나의 이상이나 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 왔다. 존경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만약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표해야 하기 때문이라면, 먼저 인사를 해 두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기력이 없는 마지막 순간에 충분히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 더 슬픈 일 아닌가. 게다가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각자의 바쁨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죽음의 순간에 모두 모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다. 그렇다면 죽음을 대비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런 말 하는 것이 어렵고 멋쩍어서 하기 어렵다는 게 그러지 못하는 표면적인 이유겠지만, 죽음을 대비함에 있어 그런 어색함은 핑계거리가 되어 주지는 않을 것 같다.

마지막, 노쇠한 상태로 집에서 죽음을 맞으려면 간병, 간호, 의료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병원이나 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여기에서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본의 간병보험(개호보험)이다. 요양보호사, 간호사의 가정 방문 서비스를 포함하여 통원·입원 서비스를 포괄하여 제공하는 이 보험제도는 노인이 자기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쉽게 말해, 집에서 필요한 요양을 요양보호사가, 의료적 돌봄을 간호사와 의사가 방문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방문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다면, 집에서 죽음을 맞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주치의가 사망진단을 내릴 것이고, 이후 필요한 장례 절차가 진행될 테니까. 우리나라도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있지만, 제공되는 서비스에 명확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보험은 시설에 입소하여 마지막을 맞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보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인 본인인가, 가족인가. 아니면 노인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고 가리고 싶은 사회인가.

지금 우리는 시설에 노인을 모아 그 죽음을 잊어버리는 시설 사회, ‘대감금’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면, 생의 마무리와 관련하여 다른 사회를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집에서 생을 잘 마감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직 우리가 그런 사회를 꿈꾸고 있지 못할 뿐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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