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대학·출연연, 실질적 국제 협력 태부족..보여주기식에서 탈피해야"
미중 패권전쟁의 본질은 첨단 국가전략기술 확보 경쟁
산학연정 공조 생태계 구축·글로벌 R&D교류협력 관건
MOU만 체결하고 실질·지속적 협력 생태계 구축 애로
퍼펙트스톰 극복 위해 연구생산성 제고·도전정신 필요
“미중 패권 전쟁의 본질은 첨단 과학기술 쟁탈전 아닙니까. 이런 때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국가전략기술 연구를 고도화해야 합니다. 국제 협력도 보여주기 식에 그치지 말고 실질적 공동 연구와 교류를 꾀해야 합니다.”
한양대 화학과 명예교수인 이해원 아시아연구네트워크코리아 회장이 23일 한양대 나노과학기술연구소 소장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센서, 바이오, 우주·항공 등 국가전략기술을 키우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과 성장 동력 확충이 힘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전략기술 고도화를 위해 산학연정(産學硏政)이 공조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글로벌 연구개발(R&D)센터 유치와 교류 협력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 협력의 경우 미국과의 실질적 공동 연구와 교류 협력 확대뿐 아니라 독일 등 유럽연합(EU), 인도, 일본, 중국,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이 회장은 “우리 국력과 위상을 감안하면 대학과 출연연이 글로벌 대학이나 연구기관과의 협정 체결과 프로그램 운용 측면에서 매우 뒤져 있다”며 “양해각서(MOU)만 체결해놓고 교류 활성화를 꾀하지 못하고, 지속성도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과학기술 위상을 주요 5개국(G5)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리더의 철학과 경험, 신뢰 기반,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조직과 예산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9년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 당시 반도체 포토레지스트(감광액)가 핵심 중 하나였는데 원래 그 분야를 연구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화학연구원에 이어 한양대에서 30여 년 동안 자외선(UV) 파장이 다른 여러 노광 장치와 원자 힘 현미경을 활용해 극미세 패턴 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대해 연구했고 관련 소부장 인력도 많이 배출했다.
-이 교수께서 그동안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에서 글로벌화를 강조해왔다. 세계적 연구소인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협력하는 연구 거점을 한양대에 구축하기도 했다.
△2008년 RIKEN과 아시아연구네트워크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양대에 공동 연구 센터를 만들었다. 1989년 처음 RIKEN을 방문했을 때 방대한 연구 시설과 선진 운영 시스템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지속적으로 방문해 장기 기초 연구 지원, 철저한 기록 문화, 교수·연구자 겸직 허용 시스템을 눈여겨봤다. 더욱이 RIKEN은 외국인도 대형 연구 사업단장으로 위촉했는데 우리나라도 이를 벤치마킹해 1999년 프론티어 연구개발 사업을 펴기도 했다. 2003년에 정부가 글로벌 연구기관들과의 협력과 연구기관의 국내 유치를 강조하면서 RIKEN을 유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RIKEN도 세계화 전략을 펴던 때여서 한양대를 비롯 서울대·포항공대·화학연·한국전자통신연구원·한국파스퇴르연구소와 협의체를 구성해 2008년 한양대에 ‘이화학연구소-한양대 연구협력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려운 점도 많았을 텐데.
△대학 등 연구계에서 세계적 연구기관과의 실질적 국제 협력을 추진한 사례가 별로 없었다. RIKEN 측을 설득하고 자금을 끌어모아 건물을 짓고 시설을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참여 교수와 관계자들 외에도 김종량 한양대 총장(현 이사장)이나 채영복 전 과학기술부 장관, 서울시, 삼성전자 등의 지원도 큰 힘이 됐다.
-당시 RIKEN과는 어떤 협력 활동을 했나.
△RIKEN은 한양대의 협력센터를 해외 연구 거점으로 지정해 주요 장비 이전, 인력 교류, 예산 지원, 공동 연구 등을 했다. RIKEN과 아시아연구네트워크(ARN) 프로그램도 같이 시작했는데 우선 한일 간 나노 분야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에 나섰다. 석·박사 과정 학생의 RIKEN 파견, ARN 여름 학교 운영, 아시아나노국제컨퍼런스 공동 개최, 일본 내 친한파 과학자 네트워크 구축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아소 다로 일본 총리,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부총재, 독일 과학기술부 차관, 싱가포르 난양공대 총장, 미국 공군연구소 핵심 관계자 등의 방문도 이어졌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확대에도 나선 것으로 아는데.
△2000년에는 ‘아시아나노국제컨퍼런스’도 창설해 조직위원장도 맡았다. 2012년에는 공익 사단법인인 아시아연구네트워크코리아를 교육과학기술부(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에 설립해 회장을 맡았다. 미래창조과학부 국제협력사업추진위원장도 했다. 그 결과 아시아 연구 네트워크를 일본·싱가포르·인도·말레이시아 등에 구축할 수 있었다. 2014년에는 ‘한중일 삼국 나노기술협력포럼’도 창립했다. 2003년부터 과기부가 미국 공군연구소와 15년간 나노·바이오·정보기술 분야 공동 연구 사업을 수행할 때도 꽤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다기능·극한·경량·고강도·다차원 구조 소재와 스마트 지능 센서 공동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국제 협력이 당초 계획대로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RIKEN의 경우 한국 거점 설치는 성공적이었으나 대학 차원의 예산 지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양 기관의 철학과 운영에 관한 시각 차이도 있었다. 우리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해외 유수 기관 유치와 공동 운영에 관한 경험이 부족하다. 그 결과 협력센터를 설치하고 불과 5년 뒤 RIKEN이 철수하고 말았다. 정부와 미 공군연구소 간 융합 기술 분야 공동 연구 프로그램도 대학·출연연이 참여하는 후속 대형 전략 프로그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요즘도 이런 현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한데.
△대학이나 출연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국제 협력 전문가와 예산이 부족하다. 출연연의 상위 기관인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도 갈 길이 멀다. 물론 요즘에는 과학기술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많이 인식하고 있어 개선될 것이라고 보지만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다.
-국제 협력이 보여주기 식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은데.
△국제 협력의 실질적 성과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등 해외 유수 연구기관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 측에서 보여주기 식으로 협약을 체결하고 지속성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대학과 출연연의 국제 협력 활성화 방안은.
△리더의 글로벌 철학, 포괄적 운영 능력과 추진력, 혁신 의지, 프로그램 내용, 조직과 예산 확보 등이 중요하다. 하지만 대학이나 출연연의 경우 풍부한 국제 협력 경험을 갖춘 국제 협력 전문가가 부족하고 조직·예산 지원도 미흡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출연연과 대학이 국가 R&D 시스템 재설계 과정에서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
△기술 패권 전쟁 시대이므로 국가전략기술 육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반도체를 이을 미래 먹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이 몰아닥치면서 출연연의 경우 대체로 내년 R&D 예산도 정체되고 정원도 동결됐다. 연구 생산성을 높이는 게 매우 시급한 과제다. 도전하고 모험하는 연구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대학과 출연연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줄여야 한다. 출연연만 해도 국가 임무형 및 사회 문제형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하되 조직에서 스스로 연구 주제와 인재 채용을 결정할 수 있게 자율성을 높여줘야 한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학력·경력도 보지 못하고 사람을 뽑는 블라인드 채용이 말이 되는가. 우리 대학이나 출연연의 글로벌화 촉진도 중요한데 은퇴 과학자 활용, 글로벌 연구소 유치와 해외 동반 진출, 과학 외교 전문가 양성도 필요하다. 산학연 공조 차원에서 화학연-나노종합기술원-생명공학연구원-전자통신연구원-대학 간 반도체 기반 배터리와 웨어러블헬스케어, 유전자 의학, 인공육 기술 확보와 실증화 사업을 꾀할 수도 있다. 산학연정이 유기적 협력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가 대부분의 국가전략기술에서 중국에 추월당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가 메모리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텐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센서, 바이오 등 국가전략기술이 얼마나 중요한가. 미국의 중국 견제 가속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우리도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시진핑 3기 체제를 맞은 중국은 기초과학과 미래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고급 인력 양성을 통해 2050년 과학기술 선도 국가로의 등극을 꾀하고 있다. 중국은 일관된 국가 정책을 짜고 지방의 성과 산학연 합동으로 엄청난 인력과 예산을 과학기술 발전에 투자하고 있다. 글로벌 협력 측면에서도 미국과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자 독일·일본과의 재료 화학, 엔진, 운송 기술 등 과학기술 협력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은 과학기술인에 대해 최고의 대우를 한다. 이공계 분야 젊은이들도 학술원 원사(한림원 정회원)가 되거나 기술 창업을 통한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경제와 안보, 과학기술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대에 G5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게 국가 과제가 됐는데.
△과학기술 거버넌스를 확립하고 전문가 집단에 의한 통합적인 과학기술 정책 추진으로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자긍심을 높여주고 도전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정부의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 철학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산학연과 지방자치단체의 혁신도 저조해 아쉽다. 정부가 연구 현장의 규제 혁파에 나서고 글로벌 교류 협력을 촉진해야 할 때다.
◆He is...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나 배재고와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휴스턴대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화학연구원에서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연구를 한 뒤 한양대 화학과 교수로 옮겨 자연과학대학장·학술연구처장·산학협력단장·석학 교수 등을 지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공동협력센터를 한양대에 설치하고 아시아연구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일본 도쿄공대, 미국 텍사스달라스대, 중국과학원 국가나노과학기술센터 등에서 특임교수 또는 객원교수로 일했다. 나노기술연구협의회장, 미래창조과학부 국제협력사업추진위원장도 했다. 현재 한경대 한국미래융합기술연구원 수석 연구위원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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