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공사 초우량 채권도 유찰..'채권안정 50조' 대책에도 시장 냉담
산은채·은행채 찍어 돈 대는 '캐피털 콜' 방식 우려
시장선 "새 돈이 필요".. 한은은 '딜레마' 상황

돈이 돌지 않는 ‘돈맥 경화’ 상태에 빠진 채권시장에 50조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나온 다음 날인 24일 단기자금 시장의 금리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단기자금 시장 바로미터인 기업어음(CP·91일물) 금리는 이날 직전 거래일보다 0.12%포인트 오른 4.37%로 오히려 상승했다. 시장 상황이 최악이었던 지난주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도 단기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금융 위기 때인 2009년 1월 이후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채권시장엔 여전히 온기가 돌지 않는 분위기다.
국고채 금리는 3년물이 0.190%포인트, 10년물이 0.129%포인트 하락 반전했지만, 이달 급등 폭을 되돌리기엔 부족했다. 채권시장 전문가들은 “좋게 말하면 관망세고, 나쁘게 말하면 ‘발표는 잘 봤으니, 이제 액션을 기다리겠다’는 국면”이라고 했다. 높은 금리에도 팔리지 않는 채권을 빨리 사들여 막힌 혈관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나
이날 채권시장에서는 한국가스공사와 인천도시공사가 각각 2년물과 3년물 채권 발행에 나서며 돈을 구했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 채권은 트리플A(AAA) 등급, 인천도시공사 채권은 더블A플러스(AA+) 등급으로 우량 채권이지만 기관이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며 나서지 않았다. A증권사 임원은 “지방정부가 보증 섰던 채권을 못 갚겠다고 나서면서 채권시장의 신뢰는 망가졌다고 보면 된다. 신뢰 회복에 시일이 걸릴 것”이라며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정부가 레고랜드 사태 한 달여 만에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소집해 내놓은 ‘50조원+알파’ 대책의 큰 줄기는 회사채와 CP를 직접 사주는 것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 돈이 묶인 증권사에 급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채와 CP를 사줄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다. 정부는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총 83개 금융기관에서 갹출해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펀드’를 꾸린다는 것인데, 펀드를 꾸릴 때 각 금융사가 돈을 마련하려면 결국 채권을 발행해 조달해야 한다는 데 맹점이 있다. 요청이 있을 때마다 자금을 지원하는 캐피털 콜(capital call) 방식인데, 정작 이 콜에 응해야 하는 회사들이 현재 자금 지원이 필요한 곳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한국투자증권 김기명 연구원은 “은행의 경우 펀드 재원 마련을 위해 은행채 발행을 더 늘리면서 시장에 부담을 줄 수 있는 등 채안펀드 캐피털 콜에 대응하는 자금 조성 과정에서 자금 시장 경색 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시장 안정화 조치 효과도 떨어지게 된다. 이미 지난달에만 은행채 발행액이 26조원을 넘어서며 전체 채권 발행량의 40%에 달했다. 대규모 적자로 운영 자금이 급한 한국전력이 찍어내는 한전채까지 합치면 현재 채권시장 자금의 절반 이상을 은행채와 한전채가 빨아당기는 형국이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이 사준다는 비우량 회사채와 CP 매입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산업은행이 매입 자금 마련을 위해 최고 신용등급의 산금채(산업금융채권)를 대규모로 발행하다 보면 낮은 신용등급 채권은 가뜩이나 수요가 말라버린 시장에서 투자자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구축 효과가 우려된다.
◇”새돈이 필요”… 시장선 한은 역할 목소리 커져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은행을 쳐다보고 있다. 한은이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시행했던 저신용등급 회사채와 CP 매입기구인 SPV(기업유동성지원기구)를 설립하거나 ‘특별대출’ 등을 통해 시장에 ‘새돈(신규 자금)’을 직접 주입해달라는 것이다. 물가 잡으려고 기준금리를 높여가며 유동성을 흡수하고 있는 한은으로선 딜레마 상황이다.
시장의 이 같은 우려 속에 정부는 대형 증권사들이 자금 사정이 어려운 중소형사들에 직접 돈을 빌려주는 방식을 거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시장에선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아이디어 차원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기금을 조성해서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돈 구하느라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타사에 빌려준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정말 급하지 않고야 현실적으로 그 돈을 받겠다는 회사도 없을 것이다. 돈을 받는다면 시장에 ‘곧 쓰러질 정도로 힘들다’는 신호를 주는 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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