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화가’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50년 화업을 이어온 이숙자(80) 화백이다. 이 화백은 서울 종로구 선화랑에서 6년 만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19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기 복제처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보리밭을 그리고 싶은 걸 어쩌냐”며 웃었다.
출품작 40점 중 신작 3점도 모두 보리밭 그림이다. 이중 ‘분홍빛 장다리꽃이 있는 보리밭’(1981년)과 ‘청보리-초록빛 안개’(2012년)는 마음에 들지 않아 올해 개작한 작품이다. 그는 “파기할까 생각했지만 내 자식이 부족하다고 버릴 순 없다”며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제가 합작한 작품”이라고 했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제자였던 그는 “무슨 그림을 그려도 천 선생님을 흉내 낸다고 했는데, 보리밭을 그리면서 그 소리가 들어가더라”라며 보리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개인전에는 1980년대 작품부터 출품돼 이 화백의 작품 세계를 두루 조망할 수 있다. 그중 단연은 ‘이브의 보리밭’(1990년)이다. 보리밭에 맨몸으로 누워있는 여성과 세밀하게 표현된 음모는 당시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의 당당한 기세가 느껴진다.
“발가벗은 여성의 몸도 사람 얼굴 보듯 낯익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낮은 여성인권에 대한 저항, 인습에 대한 반항이 내 의식 속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
최근 이 화백은 자신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그리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맨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매일 자신의 몸과 얼굴을 캔버스에 담는다. 이번에 처음 발표한 ‘푸른 모자를 쓴 작가의 초상’(2019년)이 “너무 날 곱게 그린 것 같다”면서, “볼 테면 보라지”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