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춘한 늙은 쥐의 비밀 [늙음의 과학]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한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절 탓인지, 나이 탓인지, 그동안 과로했던 결과가 축적된 탓인지, 오후만 되면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조는 날이 늘고 있습니다. 엊그제부터는 입천장도 헐고 입 주변에 물집도 잡히는 것이 면역력이 부쩍 떨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운을 못 차리자, 한 지인이 “우리 나이 때는 힘들면 병원 가서 링거 한 병 맞고 좀 쉬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즘에는 단순 포도당이나 식염수뿐 아니라 각종 아미노산과 노화 및 피로해소, 면역력 향상에 좋다는 특수 성분이 든 링거도 있으니 증상에 따라 골라 맞으면 된다고 말이죠.
피곤하면 링거 한 병?
19세기 영국 의사 시드니 링거(1835~1910)가 생리식염수를 기반으로 한 수액을 개발한 이래, 다양한 링거액이 개발됐지요. 링거액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수액 제제의 개발은 콜레라나 이질처럼 탈수증을 일으키는 질병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린 ‘기적의 약물’이었습니다. 게다가 혈액에 직접 필요물질을 투입하기에 효과가 나타나는 시간도 빠릅니다. 그래서 빠른 신체적 변화를 원하는 이들은 일종의 피로해소제나 원기보충제처럼 수액 제제를 이용합니다. 내 몸의 혈액에 뭔가 좋은 성분을 넣어준다는 사실에 일종의 생명력을 얻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혈액은 ‘생명의 원천’으로 느껴졌습니다. 건강한 상태에선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적이나 외적으로 상처를 입으면 강렬한 붉은색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고 이를 내버려두면 죽음에 이르곤 했으니까요. 중세 서양에서는 사혈(瀉血) 요법이 유행했지만, 이 역시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나쁜 피’를 뽑아내 체액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이었을 뿐, 생명체에게 혈액이 중요치 않다고는 여기지 않았지요.
공교롭게도 과학이 밝힌 통계적 수치 또한 혈액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최근까지 가장 정확하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중 가장 많은 수가 바로 혈액 속 적혈구입니다. 수로만 따지면 적혈구는 인체 구성 세포의 약 84%를 차지하며, 또 다른 혈구세포인 혈소판이 5% 정도입니다. 그러니 혈액은 얼핏 봐서는 물처럼 보여도, 우리 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약 90% 되는 수가 포함된 고밀도 조직입니다. (다만 혈액 속 적혈구와 혈소판은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 중 가장 작은 축에 속하기에 이들이 전체 몸무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포 수만 따지면 0.1%에 이르는 근육과 지방 세포가 몸무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아 전체 체중의 4분의 3 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혈액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한시도 쉬지 않고 전신을 돌아다니며 신체조직 구석구석에 필요한 물질을 전달하고 불필요한 물질을 제거하며 생명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은유가 아닌 ‘젊은 피의 수혈’
2015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개체결합으로 젊은 쥐와 늙은 쥐의 생체시스템을 하나로 연결했더니, 늙은 쥐에게서 회춘 효과와 생명 연장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죠. 젊은 쥐와 생체시스템을 공유한 늙은 쥐는 근육세포와 간세포의 분열과 활성이 증가하고 심장 세포, 줄기세포의 기능 역시 강화됐습니다. 개체결합 상태의 늙은 쥐는 보통 쥐보다 평균 4~5개월을 더 사는데(쥐의 평균수명은 약 2년입니다), 만약 사람이라면 평균수명이 15년 남짓 늘어나는 셈입니다. 늙은 상태로 15년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다시 젊어진 상태로 15년이라면 구미가 당깁니다. 하지만 평생을 누군가와 결합된 채 살아야 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굳이 두 개체를 결합하지 않아도, 늙은 쥐의 혈액을 젊은 쥐의 혈액과 절반씩 교환하면 늙은 쥐에게서 회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결과가 발표되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혈은 현재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의료 행위이며, 충분히 감당할 만한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지니까요. 2005년부터 관련 연구를 해온 미국 버클리의과대학 연구진은 젊은 쥐의 피를 수혈받은 늙은 쥐에게서 노화로 손상된 근육이 5일 만에 회복된다는 것을 확인해 발표했지요. 이젠 정말로 ‘젊은 피의 수혈’이 단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늙고 쇠약한 조직을 되살리는 실질적 방법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증폭됐습니다.
시장은 더욱 빠르게 대응합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젊은이의 피를 매입해 이를 수혈용 제제로 만들어 노인에게 되파는 벤처기업이 2017년 등장했죠. 하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그 원리가 정확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젊은 피’에 대한 열망만이 거세지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젊은이의 피를 노화 방지 목적으로 수혈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검증된 효능이 없으며, 오히려 이로 인해 혈액 관련 질병의 전파와 수혈 관련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더 크기에 피해야 한다”고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당시 늙은 쥐에게서 나타난 효과가 매우 드라마틱해 늙은 쥐보다 소외돼 보였지만 이 실험에 참여한 쥐는 한 마리가 아닙니다. 또 다른 가려진 주인공, 젊은 쥐도 있었지요. 이 젊은 쥐는 어떻게 됐을까요? 늙은 쥐를 회춘시킨 젊은 쥐는 과연 별 이상이 없었을까요?
늙은 쥐가 젊어진 만큼 늙은 ‘젊은 쥐’
안타깝게도 이 실험 결과, 늙은 쥐가 젊어진 만큼 젊은 쥐는 빨리 늙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은 ‘회춘’(回春)이었지 ‘조로’(早老) 증상이 아니었기에 젊은 쥐의 불쌍한 운명은 관심권에서 살짝 비켜났지요. 하지만 이를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앞서 늙은 쥐와 젊은 쥐의 혈액 교환 효과를 실험했던 버클리의과대학의 연구진은 늙은 쥐의 혈액으로 절반이 교체된 젊은 쥐의 경우 오히려 노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관찰했고 이를 보고했습니다.
늙은 쥐가 회춘한 이유도, 젊은 쥐가 조로 증상을 보이는 이유도 명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2년 7월, 같은 연구진이 포함된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새로운 논문(‘단일 개체 간 혈액 교환 뒤 젊은 쥐의 노화 현상’, <네이처 메타볼리즘>)에 따르면, 늙은 쥐는 회춘한 것이 아니라 노화 증상이 중화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늙은 쥐의 혈액으로 절반을 교체한 젊은 쥐는 노화세포가 늘어날 뿐 아니라 근력이 약해지고 간 기능이 떨어지는 등 노화 증세를 보입니다.
특히 연구진은 노화세포 증가에 주목했습니다. 노화세포란 세포가 손상을 입어 더는 분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지도 않는 상태로 살아남은 세포를 말합니다. 손상됐기에 제 기능을 못하면서도 죽지 않고, 게다가 주변의 정상 세포마저 손상시키는 염증성 물질을 분비하기에, 이 모습이 마치 시체이면서 살아 있는 인간을 공격하는 좀비를 닮았다 하여 ‘좀비세포’로 불리기도 하지요.
‘좀비’ 노화세포는 일반적으로 개체가 나이 들어 세포 손상이 축적되면서 점차 늘어나기에, 노화세포의 양 자체가 개체 노화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늙은 쥐의 혈액에는 노화세포가 다량 포함됐고, 이것의 악영향으로 젊은 쥐에게서 노화 현상이 촉진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늙은 쥐에게서 추출한 혈액에 노화세포의 부정적 기능을 억제하는 약물을 주입한 뒤 투여하면 젊은 쥐에게서 조로증 현상이 확연히 덜 나타났습니다.
세탁세제를 삼키면 물을 마셔 희석시키듯
이 연구는 무엇을 암시할까요? 바로 노화와 회춘의 비밀 열쇠는 젊은 피가 아니라, 오히려 나이 든 쪽이 쥐고 있다는 겁니다. 연구진은 젊은 피 수혈에 따른 늙은 쥐의 회춘 현상이 실제로는 젊은 피에 노화 방지 물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늙은 쥐의 혈액 속 노화세포를 일부 제거해 나타난 희석 효과였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가정용 세탁세제의 뒷면을 자세히 보면, 실수로 먹거나 삼켰을 경우 즉시 많은 양의 물을 마셔 희석하라는 경고문이 있습니다(물론 다음에는 꼭 병원에 가셔야 하고요). 이들의 자극성과 부식성은 농도와 큰 연관성이 있기에 아주 많은 양의 무해한 물로 해당 물질의 양을 일정 농도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이 손상을 덜 입는 방법이거든요.
늙은 쥐에게서 절반의 혈액을 교환한다는 것은,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 수의 절반 가까이를 제거하고 새로 넣어주는 일입니다. 이때 새로 들어온 피는 젊은 쥐에게서 유래했으니 노화세포 수도 그만큼 적겠지요. 다시 말해, 늙은 쥐의 몸에선 일시적으로 노화세포 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입니다. 노화세포가 줄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던 부정적 효과도 사라지므로, 일시적으로 신체가 회복 증상을 보인 것입니다. 그랬기에 젊은 쥐에게서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고요. 이는 혈액 교환 뒤, 늙은 쥐에게서 나타나는 긍정적 효과보다 젊은 쥐에게서 나타나는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만약 젊은 피에 회춘을 일으키는 물질이 들었다면, 늙은 피가 들어와 부정적 효과를 일으켜도 이를 중화시킬 수 있으므로 그 정도가 줄었을 테니 말이죠.
이 실험 결과는 젊은 피만 수혈하면 노화에서 벗어날지 모른다고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화의 실마리는 노화세포 수에 있고, 혈액 속 노화세포 수에 따라 간과 근육, 뇌 등에서 노화 정도가 달라지며, 여전히 비밀 열쇠는 혈액 속에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든 조직이든 원래 낡은 조직을 그대로 두고 젊은 피만 수혈해서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고요.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하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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