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돋보기]⑮ 10m 조수간만 차 극복..인천항 갑문

홍현기 2022. 10. 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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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항 지킴이 역할..홍보관에선 3D 그래픽으로 구현

[※편집자 주 = 인천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서 신문물을 처음 맞이하는 관문 도시 역할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유산만 보더라도 철도·등대·서양식 호텔·공립 도서관·고속도로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연합뉴스 인천취재본부는 이처럼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이 서린 박물관·전시관을 생생하고 다양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모두 30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 기사는 매주 토요일 1편씩 송고됩니다.]

선박이 갑문을 통과해 내항에 들어서는 모습을 3D 그래픽으로 구현한 홍보관 [촬영 홍현기]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밀물과 썰물 때 수위 차이가 10m에 달했다. 썰물 때면 갯벌이 훤히 드러나 인천항에 선박을 접안하기 어려웠다.

규모가 큰 외국 상선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채 승객과 짐을 실어나를 조그만 선박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인 1918년 인천항에 설치된 갑문은 이 같은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게 한 시설이다. 갑문은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선박이 수시로 선거(船渠·도크)에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왔다.

갑문 설치로 인천항은 국제 무역의 거점 항구로 성장한다. 1974년 제2의 갑문이 새로 설치되면서 형성된 인천 내항은 지금도 차량과 미곡 등 수출입을 담당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1914년 11월 17일 인천항 갑문 공사현장에서 콘크리트 시공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축항도록. 재판매 및 DB 금지]

'국제항구도시'로 변모한 인천…갑문 설치로 급성장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인천항(제물포항)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강제 개항 이후 국제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나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항은 간조 때 선박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인천항 부두에 직접 접안하기 어려웠던 큰 선박은 월미도 남쪽 수로에 정박한 채 승객과 짐을 옮겨줄 작은 선박을 기다려야 했다. 소형선박은 대형 선박에 접근해 화물을 잔교(접안시설)가 있는 부두로 옮겼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갑문 공사가 추진됐고 1918년 10월 27일 거대한 갑문 설치가 마무리됐다.

인천부(현 인천시)가 1933년 발행한 인천부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 갑문 문짝은 높이 14.63m, 폭 10.36m, 두께 1.22m 규모였다.

조선총독부 관방토목국이 1918년 발행한 '인천축항도록'을 보면 총독부가 인천항 부두 시설과 갑문 시설 공사에 들인 총공사비는 566만원이다. 이는 현재 화폐 가치로 따져보면 3천억∼5천억원 수준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문 방식으로 설치된 갑문은 대형 선박의 상시 접안을 가능하게 해 인천항을 급성장하게 하는 발판이 됐다.

갑문 준공에 따라 당시 인천항에는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된다.

인천항에 오는 선박은 수시로 외측 갑문을 통과해 '갑거'에 들어선 뒤 수위 조절을 거쳐 내측 갑문을 통해 입항했다.

인천항 갑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천 산업 지형도 변모…제2갑문으로 재도약

갑문을 비롯한 부두 시설 확충으로 인천항의 총무역액은 1910년부터 1939년까지 29년간 40배가량 증가했다.

인천항의 성장은 인천 산업 지형에도 영향을 줬다. 1930년대 동구 송현·화수·만석동 일대 매립지를 중심으로 공단이 형성되고, 해방 후에는 한반도 최대 수입항 지위를 거머쥐게 된다.

수도 서울의 관문이자 각종 산업 물자 조달항 역할을 하면서 1946년에는 한국 총수입의 94%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고 원조물자 등도 대부분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한국 제1무역항의 지위는 부산으로 넘어가게 된다.

부산에 밀려 쇠퇴하던 인천항은 새로운 갑문을 설치하고 항만 시설을 확장하는 제2선거 건설을 계기로 재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제2선거 건설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추진됐으나 일본이 태평양 전쟁 확대에 따라 공사비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무산됐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공사를 시작해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5만t급 대형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갑문을 설치하고, 151만㎡ 면적 내항을 조성한다.

이 시기 한국 최초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남부두와 양곡부두가 조성됐고, 인천항 하역능력은 1966년 142만t에서 1976년 872만t으로 늘어난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인천은 항구로 적합하지 않은 도시였지만 갑문 설치로 본격적인 산업항으로 성장하게 된다"며 "산업화 시기에는 내항 확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인천의 경제발전을 이끌어 가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8년 8월 5일 인천항 갑문에서 통수식이 열리고 있다. [인천축항도록. 재판매 및 DB 금지]

갑문 덕에 일정 수심 유지하는 내항…차량 선적에 유리

100년 전 인천항에 최초로 축조된 갑문은 바닷속에 가라앉거나 시설물이 철거돼 지금은 실물을 보기 어렵다. 인천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부두 시설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상태다.

제2선거 공사로 1974년 설치된 갑문은 증설 공사를 거쳐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갑문은 모두 8개로 인천 내항과 외항을 연결하는 2개 수로에 설치돼 있다. 이들 수로를 따라 최대 길이 307m, 너비 32m 선박이 내항으로 들어올 수 있다.

하루 수용 가능 선박 수는 52척이다. 갑문 덕분에 인천 내항은 항상 일정 수심을 유지할 수 있어 차량 선적 등에 유리하다.

남운하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장은 "지금도 내항 일대에는 많은 곡식저장고(사일로)가 운영 중이고 차량 수출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인천 신항 등의 성장에 따라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이 분산되면서 갑문에 들어오는 배는 줄어드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인천항 갑문 인근 갑문운영사무소 건물에서는 '갑문홍보관'이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인천항으로 온 선박이 갑문을 통과해 내항에 들어서는 모습을 3D 그래픽으로 볼 수 있고 개항 이후 인천항 변천사와 선박 관련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선장처럼 배를 몰아 직접 갑문을 통과해볼 수 있는 3D 영상 장비도 마련돼 있다.

건물 5층 야외 전망대에서는 때만 맞으면 갑문 통과 선박을 직접 보는 이색 경험도 할 수 있다.

월미도에 있는 홍보관은 즐길 거리가 많은 월미공원·월미테마파크와도 인접해 연계 관광을 하기에도 좋다.

갑문홍보관 운영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토·일요일에는 휴관한다.

인천항 갑문홍보관 [촬영 홍현기]

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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